2. 만법이 오직 '마음'으로 지어진 것임을 밝힌다.(萬法唯識)
   
  만법이 오직 '마음'으로 지어진 것임을 밝힌다.(萬法唯識) 앞에서는 '티끌 경계'의 성품이 없음을 밝혔으나, 여기서는 관찰의 주체인 '마음'의 공능(功能)을 살핌으로써 인식작용(認識作用)이 갖는 결정적인 허구성을 밝히고자 한다.
     
   

사람들은 흔히 '의식'(意識)의 활동인 인식작용을 이해하기를, '관찰의 주체'(能)가 있어서 '관찰의 대상'(所)을 보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와 같은 생각은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사람이 사물을 본다>는 사실 자체의 근간(根幹)부터 철저히 구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선 <우리 인간은 '의식의 영역'(意識領域) 바깥에 있는 사물을 알아볼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아직 재간이 미숙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지혜가 덜 깨서 그런 것도 아니고, '법의 이치'가 본래 그런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마음'은 이 안에 있고, '사물'은 저 바깥에 있는 것이라면, '안의 마음'과 '바깥의 사물'과의 사이에는 필시 '경계'가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안의 '마음'과 바깥의 '사물'이 서로 이르러(到) 닿지도 못할 터인데 어떻게 '마음'이 바깥의 '사물'을 알아볼 수 있겠는가? ― 사람이 '자기 마음'으로 짓는 것만을 볼 수 있고, 저 바깥의 것은 볼 수가 없다니, ― 그렇다면 지금 현재 면전에서 우리들이 보고 듣고 하는 이 숱한 '빛깔'과 '소리'들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좋건 싫건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인간존재의 실상'인 데야 어쩌겠는가.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이 <'진실'에 눈을 뜬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혀내는 일에 다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놀라운 언명에 내재하는 폭발성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하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일체 만유가 오직 자기 '자신의 마음'에 의해서 순간순간 전혀 요술처럼 지어지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매양 면전에 전개되는 여러 현상들을 보기를, ― 저 바깥에서 자체의 규범을 따르면서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그래서 이 '마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독립적인 실체인 줄로 오인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고,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앞으로도 속절없이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고인들은 말하기를, 「어리석은 중생들이 '제 마음'을 '물건'이라고 하네」 하고 탄식하면서, 그 뒤바뀐(顚倒) 망견(妄見)을 꾸짖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관찰행위의 실상은 과연 무엇인가? ··· 사람들이 <사물을 본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저 바깥에 있는 사물을 직접 보는 것이 아니고, 우선 그 사물을 대했을 때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선험적(先驗的)인 '영상'을 투영하고는 그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불가'에서는 상분(相分)이라 하는데, 이 '상분'은 과거의 개인적인 경험들이 기억의 형태로 축적되어 있다가, ― 이 기억의 파편들이 쌓이고 엉키고 한 것이 바로 '의식'이다 ― '사물'을 대하는 순간, 그 사물과 유사한 기억의 한 토막을 재빨리 찾아내서, 그것이 머릿속에 떠오르게 되면, 사람들은 그 영상(影像)을 인식하기를, 마치 저 바깥에 있는 대상을 보고 있는 양 착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관찰행위의 진실이다.
 
우리는 어렸을 적에, 다섯 사람의 소경이 코끼리를 보는 우화(寓話)에 대해 들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 기억을 되살리면서 한 번 생각해 보자. ··· 한 소경은 코끼리의 배를 만지면서 한 참 머리를 갸웃거리더니, "코끼리는 마치 바람벽 같이 생겼구나" 하고 말한다. 또 한 사람의 소경은 코끼리의 다리를 만지면서 역시 한참 을 더듬거리더니 말하기를, 「코끼리는 마치 둥근 기둥처럼 생겼구나」 하고 말한다. ··· 이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어볼 필요도 없이, ― 우리는 그들이 본 것이 <자기 자신의 과거의 기억 속의 한 토막>을 되살려서는, 그것을 마치 현재에 코끼리를 보고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그들이 눈을 떠서 직접 코끼리를 보았다면, 그 때 과연 그들은 무엇이라고 할까?
 
보통 사람의 경우는 이와 같은 과정이 거의 순식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관찰 행위의 내막에 이런 곡절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리고는 비슷한 영상이 투영되면 "아! 알았다"고 여길 것이고, 또 아무리 해도 비슷한 영상을 찾아낼 수 없으면,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꿈'의 '메커니즘'을 생각해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꿈속에 나타나는 사물은 '나' '남' 할 것 없이, 그것이 모두 '제 마음'이 변해서 나타나는 것임에 틀림없는데도, 사람들은 꿈을 꾸면서 내내 저 바깥의 사물을 보고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가.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아름다운 무지개를 보거나, 눈부시게 찬란한 저녁 노을을 보거나, 또는 아름다운 자태의 남녀를 보거나 할 때에는 그 모두가 오직 '그것'이, ― 사실은 '그것'이라 할 만한 것도 없지만 ― 요술처럼 변해서 나타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또한 바람 소리, 물소리,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등, 이 세상의 온갖 다양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들으면, 그것도 역시 '그것'의 소리인 줄로 알아야 할 것이며, 결단코 저 바깥에 온갖 '빛깔'이나 '소리' 가 있어서, 그것을 보고 듣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요컨대, 우리들이 현재 보고 듣고 하는 것은, 사실은 저 바깥의 사물을 보고 듣고 하는 것이 아니고, (저 바깥에는 실로 한 물건도 없다) 자신의 '의식의 창고'를 뒤져서는, 그 가운데의 알맞은 기억의 한 토막을 되살려서, 그것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결국은 '마음'이 '마음'을 보고 있는 셈이니, ― 손가락으로 손가락을 만질 수 없고, 칼로는 칼을 베일 수 없듯이, ― '마음'으로 '마음'을 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옛 성현들은 이르기를, 「이 보고 들음이 보고 들음인 채로 보고 들음이 아니니, 빛깔과 소리를 드러내 보일 길이 없도다」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같이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바의 면전의 '티끌 경계'가 전혀 자기 자신의 '망령된 마음'(妄心)에 의해서 나타난 허망한 '업의 그림자'(業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아 알아서, 다시는 미혹(迷惑)에 빠져서 집착을 일으키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