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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의식'(意識)의 활동인 인식작용을 이해하기를, '관찰의 주체'(能)가 있어서
'관찰의 대상'(所)을 보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와 같은 생각은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사람이 사물을 본다>는 사실 자체의 근간(根幹)부터 철저히 구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선 <우리 인간은 '의식의 영역'(意識領域) 바깥에 있는 사물을
알아볼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아직 재간이 미숙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지혜가 덜 깨서 그런 것도 아니고, '법의 이치'가 본래 그런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마음'은 이 안에 있고, '사물'은 저 바깥에 있는 것이라면, '안의 마음'과 '바깥의 사물'과의
사이에는 필시 '경계'가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안의 '마음'과 바깥의 '사물'이 서로 이르러(到) 닿지도 못할 터인데
어떻게 '마음'이 바깥의 '사물'을 알아볼 수 있겠는가? ― 사람이 '자기 마음'으로 짓는 것만을 볼 수 있고,
저 바깥의 것은 볼 수가 없다니, ― 그렇다면 지금 현재 면전에서 우리들이 보고 듣고 하는 이 숱한 '빛깔'과
'소리'들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좋건 싫건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인간존재의 실상'인
데야 어쩌겠는가.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이 <'진실'에 눈을 뜬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혀내는 일에 다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놀라운 언명에 내재하는 폭발성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하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일체 만유가 오직 자기 '자신의
마음'에 의해서 순간순간 전혀 요술처럼 지어지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매양 면전에 전개되는 여러 현상들을
보기를, ― 저 바깥에서 자체의 규범을 따르면서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그래서 이 '마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독립적인 실체인 줄로 오인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고,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앞으로도 속절없이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고인들은 말하기를, 「어리석은 중생들이 '제 마음'을 '물건'이라고 하네」 하고 탄식하면서, 그 뒤바뀐(顚倒)
망견(妄見)을 꾸짖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관찰행위의 실상은 과연 무엇인가? ··· 사람들이 <사물을 본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저 바깥에 있는 사물을 직접 보는 것이 아니고, 우선 그 사물을 대했을 때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선험적(先驗的)인
'영상'을 투영하고는 그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불가'에서는 상분(相分)이라 하는데, 이 '상분'은 과거의
개인적인 경험들이 기억의 형태로 축적되어 있다가, ― 이 기억의 파편들이 쌓이고 엉키고 한 것이 바로 '의식'이다
― '사물'을 대하는 순간, 그 사물과 유사한 기억의 한 토막을 재빨리 찾아내서, 그것이 머릿속에 떠오르게 되면,
사람들은 그 영상(影像)을 인식하기를, 마치 저 바깥에 있는 대상을 보고 있는 양 착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관찰행위의 진실이다.
우리는 어렸을 적에, 다섯 사람의 소경이 코끼리를 보는 우화(寓話)에 대해 들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 기억을 되살리면서
한 번 생각해 보자. ··· 한 소경은 코끼리의 배를 만지면서 한 참 머리를 갸웃거리더니, "코끼리는 마치 바람벽
같이 생겼구나" 하고 말한다. 또 한 사람의 소경은 코끼리의 다리를 만지면서 역시 한참 을 더듬거리더니 말하기를,
「코끼리는 마치 둥근 기둥처럼 생겼구나」 하고 말한다. ··· 이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어볼 필요도 없이, ― 우리는
그들이 본 것이 <자기 자신의 과거의 기억 속의 한 토막>을 되살려서는, 그것을 마치 현재에 코끼리를 보고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그들이 눈을 떠서 직접 코끼리를 보았다면, 그 때 과연 그들은
무엇이라고 할까?
보통 사람의 경우는 이와 같은 과정이 거의 순식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관찰 행위의 내막에 이런 곡절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리고는 비슷한 영상이 투영되면 "아! 알았다"고 여길 것이고, 또 아무리 해도 비슷한
영상을 찾아낼 수 없으면,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꿈'의 '메커니즘'을 생각해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꿈속에 나타나는 사물은 '나'
'남' 할 것 없이, 그것이 모두 '제 마음'이 변해서 나타나는 것임에 틀림없는데도, 사람들은 꿈을 꾸면서 내내 저
바깥의 사물을 보고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가.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아름다운 무지개를 보거나, 눈부시게 찬란한 저녁
노을을 보거나, 또는 아름다운 자태의 남녀를 보거나 할 때에는 그 모두가 오직 '그것'이, ― 사실은 '그것'이라
할 만한 것도 없지만 ― 요술처럼 변해서 나타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또한 바람 소리, 물소리,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등, 이 세상의 온갖 다양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들으면, 그것도 역시 '그것'의 소리인 줄로 알아야 할
것이며, 결단코 저 바깥에 온갖 '빛깔'이나 '소리' 가 있어서, 그것을 보고 듣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요컨대, 우리들이 현재 보고 듣고 하는 것은, 사실은 저 바깥의 사물을 보고 듣고 하는 것이 아니고, (저 바깥에는
실로 한 물건도 없다) 자신의 '의식의 창고'를 뒤져서는, 그 가운데의 알맞은 기억의 한 토막을 되살려서, 그것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결국은 '마음'이 '마음'을 보고 있는 셈이니, ― 손가락으로 손가락을 만질 수
없고, 칼로는 칼을 베일 수 없듯이, ― '마음'으로 '마음'을 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옛 성현들은
이르기를, 「이 보고 들음이 보고 들음인 채로 보고 들음이 아니니, 빛깔과 소리를 드러내 보일 길이 없도다」라고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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