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마음'이 '마음'이 아닌 줄 알아야 한다
     
   

이미 앞에서 무생법인(無生法忍)에 대해 자세히 밝힌 터이므로, 그것이 '물질'이건 '마음'이건 예외 없이 모두가 빈 이름뿐이요, 실체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하여졌다. 따라서 본래 움직임 없는 '참 마음'만이 유일하고 참된 것임이 분명한데도, 워낙 오랜 세월 동안 이 움직이는 '몸'과 움직이는 '마음'을 붙잡아서 '나'로 삼고 살아온 터라, 인연 따라 생멸하는 환과 같은 존재를 실유(實有)로 보면서 쌓인 색루(色累) 는 좀처럼 다할 줄 모른다. 왜냐하면 '존재'에 헷갈렸던 마음이 '진실'에 눈을 떠서 그 마음속에서 일체의 질애(質碍)가 소멸한다는 것은 곧바로 <자기 몰락의 길>로 들어서는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모든 물질적인 존재는 인연을 따르면서 나는 것이기 때문에 겉으로 볼 때에는 생겨나는 듯이 보여도 실제로는 나는 것이 아니어서, 마치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제 성품'이 없는 것임을 이해할 수는 있겠는데, 그래서 이 '몸'을 환화공신(幻化空身)이라고 불러도 그런대로 별 이의가 없는데, ··· 그런데 이 '마음'만은 아무리 살펴봐도 실제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여서 도무지 쉬어지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자고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마음'을 쉬는 일이야말로 가장 성취하기 어려운 난제 중의 난제였으며, 때문에 어찌 보면 '명상'이니 '좌선'이니 하면서 거의 모든 수행이 오직 이 <마음을 쉬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석마하연론(釋摩訶衍論)에 보면, 「 '한 생각'이 처음 일어나되, 처음의 모양이 없다 」는 대목이 있다. 이 말의 뜻을 해석하면 「 '한 생각'이 일어나기는 일어나는데, 사실은 일어나는 '마음'이 없다 」는 뜻이 된다. 이것이 바로 '붓다'가 설파한 무심(無心)의 참 뜻이며, 이는 곧 무생법인(無生法忍)에 다름 아닌 것이다. '생멸 있음'과 '생멸 없음'이 두 법이 아님을 밝힌 것이 곧 '무생법인'의 참 뜻이므로 따라서 이것은 '마음이 없는 것'으로써 '무심'을 삼는 이승(二乘)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마음 공부'를 하는 사람들의 고질적인 의증(疑症)을 해소하고, 올바른 이해를 돕는 데 매우 좋은 실마리를 제공한다.
 
요약컨대, 지금처럼 치성하게 일어나는 이 마음이 바로 그대로 일어남이 없는, '공적한 마음'임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시끄러운 마음'을 억지로 안정시켜서 '고요한 마음'으로 바꾸는 것으로써 '수행'의 요체로 삼고, 「잡인(雜人) 출입 금지」 라는 팻말을 써 붙여 놓고는, 스스로 순인연(純人然) 하면서, '지혜'도 없이 오늘도 그저 멍청하니 앉아만 있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분명히 깨달아야 할 일이다. 이것은 마치 '물결'을 여의고 '물'을 얻으려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모름지기 알아야 할 일은, 우리의 '참 마음'(眞心)은 무시 이래로 일찍이 움직였던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지금에 있어서 쉴 새 없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이 '시끄러운 마음'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것은 '마음'이 아니라, 다만 움직임이 없는 '참 마음' 위에 허망하게 나타나는 '업의 그림자'(業影)인 것이다. ― 보고 듣고, 헤아리고 짐작하고 따져서 알고, 분명히 알고, 능히 알고 하는 등의 ― 이 마음은 실은 '마음'이 아니라, 다만 저 바깥의 허망한 '티끌 경계'를 비추는 그림자인 것이다. 결국 알고 보면, 우리 인간들은 이 허망한 그림자를 '내 마음'인 줄로 잘못 알고는, 평생을 두고 이 '망령된 마음'(妄心)을 따르고 섬기고 하면서 살아왔던 셈이니,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이 같은 사실을 분명히 깨닫는 일이야말로 모든 공부하는 사람이 필히 넘어야만 하는 험한 고개임을 알아야 한다.
 
'참 마음'(眞心)은 스스로 청정해서, 성품 없고(無性), 모양 없고(無相), 작용도 없이 (無作) 본래 스스로 온전히 이루어져 있는 것이니, 이제 새삼스럽게 이루어지기를 기다릴 것이 없고, '망심'(妄心)은 허망해서 본래 나(生)는 일이 없으니, 구태여 없애기를 기다릴 것이 없으니, ··· 결국 안팎이 항상 <지금 있는 이대로> 가지런히 적멸해서, 「'생사'가 그대로 '열반'이라」는 지극한 이치가 홀연히 현전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안으로 육근(六根)과 밖으로 육진(六塵), 그리고 그 사이에서 헛되이 굴려지는 육식(六識)이 몽땅 허망해서, 집착할 것도 없고 여읠 것도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닫는 일이야말로 '참된 공부'의 시작이요,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