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유 무(有無) 양변을 함께 여의어야 '올바른 공부'(정)이다.
   

경전 가운데서 가장 자주 눈에 뜨이는 글자가 아마도 '무'(無)자일 것이다. 그래서 선가(禪家)에서도 이른바 '무자 화두'(無字話頭)가 마치 약국의 감초처럼 가장 많이 거론(拈)되는 화두가 된 것 같다. 그 밖에도 '남이 없음'(無生), '성품 없음'(無性), '모습 없음'(無相), '작용 없음'(無作), '머무름 없음'(無住)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이 '무'자는 등장 빈도가 높다.

그러나 이 모두가 '온갖 사물'에 대한 존재론적인 집착을 여의고, 학인으로 하여금 <유·무의 포섭(包攝)이 아닌 '참 성품'(眞性)>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방편으로 '없다'고 말했던 것뿐이다. 곧 사람들이 눈에 뜨이는 것마다 모두가 마치 꿈속에서 보는 것과 같은 허망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실다운 존재(實有)로 오인하여 집착을 일으키므로, 이 집착을 막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방편으로 '없다'고 말한 것뿐인데, 사람들은 이 뜻을 알지 못하고, 그저 '없다'고 말하면 없는 줄로만 알고, '있다'고 말하면 있는 줄로만 알아들어서 도무지 그 지견 놀이를 막을 수가 없다. 눈밝은 사람이라면 '법계'가 오직 하나의 허공성일 뿐이어서, 도시 '이것'이라고 가리킬 만한 한 물건도 없을 터인데 어떻게 '있다'커니 '없다'커니 결정적으로 말할 게 있겠는가. 다만 중생의 완고한 유·무 양변(兩邊)을 타파하기 위해서 그저 '있다'고 집착하면 '없다'로 다스리고, 다시 '없다'고 집착하면 '있다'로 다스렸던 것이다. 결국 팔만 사천 법문이란, 다 이렇게 해서 어쩔 수 없이 방편으로 설해진 것일 뿐인데, 미혹한 중생들이 마치 그것이 깨달은 사람의 안목이라도 되는 양 잘못 알고는 매양 그 '말'에만 매달리면서 헛된 지견 쌓기에만 골몰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그저 난감할 뿐이다.

이쯤에서 꼭 명심해야 할 일이 있다. 즉 ― 모든 법의 실상을 분명히 본 사람은 진실로 볼 만한 법도 없고, 알 만한 법도 없는 것이다. 그런 그가 어찌 별달리 설명할 말이 있겠으며, 드러내 보일 만한 '이치'가 있겠는가. 실로 성인은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학인이라면 우선 먼저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 알아야 할 일이다. 어찌 대장부가 남의 말만 좇으면서, 흙덩이를 물어뜯는 영리한 개의 시늉을 계속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고인들은 이르기를, 「'보고 듣고 깨닫고 알고'(見聞覺知) 하는 것이 실제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줄 아는 자는 제도하지 못한다」고까지 극언했던 것이다. 사실 '부처'는 "모든 법은 '성품'이 없다"든가, 또는 "모든 법은 남(生)이 없다"는 등으로 결정해(決定解)를 지어서 할 말이 도 무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성인의 참 뜻'(聖旨)을 헤아리지 못하고, 요즘 공부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거개가 그저 한결같이 <남의 말만을 좇는 무리>(逐塊之類)들 뿐이어서, 거의 예외 없이 성인들이 방편으로 베푼 언교(言敎) 속으로 떨어져서, 그저 '있다'고 하면 있는 줄만 알고, '없다'고 하면 없는 줄만 알면서 허구한 날 남들이 뱉아놓은 '죽은 말'(死句)만 잔뜩 기억하여 짊어지고 다니니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한 편으로, 좀 귓구멍이 뚫렸다는 무리들은 막무가내로 이른바 '부정하는 말'(遮詮)만을 추켜들고 다니면서, "모든 법은 꿈같고 허깨비 같아서 한 법도 실다운 것이 없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마음 밖에는 한 법도 없다"고 말하면서 '정법'을 비방하는 것을 본다. 그리하여 <무엇이건 "없다", "아니다"로 일관하는 무리> (撥無之狐)들만 횡행하니, 참으로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결국 남의 말만을 좇는 무리들도, 또 무조건 남의 말을 부정하는 무리들도 모두가 참된 깨달음을 얻기는 글렀다는 사실을 거듭 명심해야 한다.

모름지기 '참된 수행자'라면, 자기의 '참 마음'(眞心)이 본래 청정하여 새삼 이루어지기를 기다릴 것이 없고, '망령된 마음'(妄心)은 본래 남(生)이 없어서 새삼 없애기를 기다릴 것도 없음을 분명히 깨달아서, 조작(造作)할 것도 없고 대처(對處)할 것도 없이, 그저 <지금 있는 이대로인 채로> 어느 것 하나도 불사(佛事)가 아님이 없고, 어느 하나도 '부처' 아님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을 일이다.

때문에 지혜로운 이라면, '없음'에 대해서 들었을 때에도, '있음'만을 보내는 것이 아니고, '없음'까지 함께 보내서, '있음과 없음'을 쌍으로 여읠 줄을 알아야 비로소 이것이 '올바른 수행'(正修)이며, 이렇게 되어야만 비로소 '일승의 길'을 가는 참된 수행자라 할 것이다.

따라서 "빛깔과 소리를 여의어야 한다"고 들었을 때에도, 만약 일승보살(一乘菩薩)이라면, '빛깔'과 '소리'에 집착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으면서, 곧장 <'마음'을 돌이켜서>(廻心) '근원'으로 돌아갈 줄 알 것이며, 그리하여 종일토록 '보고 듣고 깨닫고 알고' 하면서 종횡으로 자재하게 세상사를 굴리면서도, 종일 <아무 것도 없는 것>을 굴리듯 하여서, 이른바 마치 <허공에 바람 가듯> 하는 걸림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