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반드시 <정·혜를 가지런히 닦아야>(定慧雙修) 한다.
   

행인지 불행인지는 몰라도, 여하튼 이 땅의 불교는 선종(禪宗)이 주류를 이룬다. 그리하여 이른바 혜능(慧能)의 맥을 이은 것으로써 마치 불가(佛家)의 적자(嫡子) 인 양 행세하면서도, 그나마 막상 제대로 조사(祖師)의 법맥(法脈)을 이은 사람을 찾아보기는 그야말로 쌀에 뉘 섞이듯 만나기 어려운 실정이다.
 
대저 그것이 교문(敎門)이건, 선문(禪門)이건 간에 (현존하는 일체의 종교나 종파 가 다 그렇지만 ··· ) 이 모두가 오직 중생으로 하여금 '성품'을 깨쳐서 성불 하게 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베풀어진 것으로서, 다만 수행자가 잠시 통과 해야 할 '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바보가 아닌 바에야 어찌 허구한 날 문지방에 가부좌(跏趺坐)하고 앉아서, 마치 '구경'(究竟)에 도달하기라도 한 양, 제법 근엄한 화상(化相)을 짓고 앉아 있는 것으로써 능사를 삼겠는가. 여러 말 할 것도 없이, ― 가령 선바라밀(禪波羅密)만 하더라도 십바라밀(十波羅密) 중의 다섯 번째 '문'에 해당하는 것만 보아도 알 만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만약 선(禪)에 집착하여 청정한 '본래 성품'만을 내세우면서, 마치 거울은 본래 스스로 맑고 깨끗하므로 닦을 것도 없고 털 것도 없다고 알아서, 짓지도 않고 수행도 하지 않는다든가, 또는 법(法)에 집착하여 '현상의 행'(現象行)을 일으키면서 의타(依他)의 훌륭한 인연을 구하여 자기의 덕(德)을 이루기를 바란다든가 한다면, 이 두 가지 모두가 치우친 집착을 이루는 것이니, 때문에 반드시 정(定)과 혜(慧)를 가지런히 닦을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참된 수행자라면 모름지기 그 마음이 '멍청하니 가라앉지도'(昏沈) 않고, '망령되게 들뜨지도'(掉擧) 않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선정(禪定)과 지혜 (智慧) 가운데서, '선정'이 과하면 이것이 바로 '혼침'이고, '지혜'가 과하면 이것이 바로 '도거'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고요한 마음' (定心)으로써 '구경'(究竟)인 줄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참으로 삼갈 일이 아 닐 수 없다. 물론 처음 발심한 사람이라면 정식(情識)의 억센 기운을 다잡기 위해서 '고요한 마음'이 없을 수 없겠다. 그렇지만 이제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여, 온갖 법이 다만 '제 마음'이 변해서 나타난 허망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밝혀낸 터이므로, 따라서 그것이 '고요함'(定)이건 '산란함'(散)이건 간에 그 모두가 다 체성이 없는 '마음의 자취'에 지나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 '마음의 모양'(心相)을 보지 않는 것을 '바른 선정'(正定)이라 하거늘, 어찌 시끄러움을 피하면서 '고요한 마음'(靜慮)을 지키겠는가?』고 했다. 그렇다면 '시끄러움'을 피하여 '고요함'을 추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궁극적으 로는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는 것>(起心動念)도, <선정과 지혜를 쌍으로 닦는 것>(定慧雙修)도, 그 모두가 끝내는 공연한 '움직임'을 이룰 뿐이요, 나아가서 <양변(兩邊)이 다 아니라>(雙非)고 하건, <양변을 다 보내야 한다>(雙遣)고 하건, 역시 이 모두가 다 '쓸데없는 의논'(戱論)임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설사 '선정'과 '지혜'를 쌍으로 잘 닦아서 적멸(寂滅)한 경지를 얻었다 하더 라도, 만약 그가 스스로 "아! 참으로 고요하구나" 하면서 그 적멸한 경지를 인식한 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근'(意根)으로써 '법진'(法塵)을 반연(攀緣)하는 데 지나 지 않으므로, 이는 어디까지나 '참 지혜'가 드러난 게 아니고, 여전히 '의식'이 교묘 하게 다시 가면을 바꾸어 쓰고 나타난 데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결코 그것은 '항상한 고요함'(常寂)이 아닌 것이니, 먼저는 시끄러웠다가 지금에야 고요해졌다면 그 '고요함'에는 '시작'이 있는 것이니, 모든 것이 '시작'이 있으면 반 드시 '끝'이 있게 마련인데, 그렇다면 어찌 그것을 '항상한 고요함'이라 할 수 있겠 는가?
그러므로 '참 성품'의 <본래 스스로 적멸한 경지>는 결코 학인에 의하여 증득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끝내는 지금 당장 몰록 '무심정'(無心定)에 들어서, ― 전방으로는 아직 도달해야 할 마을에 도달하지도 못 하였고, 뒤로는 돌아가서 쉬어야 할 '고향 집'에도 아직 이르지 못한, ― 바로 그 자 리에서 문득 활로(活路)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이 세상 온갖 것을 그저 <지금 있는 이대로> 담담히 비출 수 있어야만, 즉 '적조의 힘'(寂照力)이 고요히 그 '마음'에 깃들어야만 비로소 일체가 모두 쉬어서, 곧장 '성스러운 도'(聖道)에 잠잠히 계합할 것이다.

 따라서 불장경(佛藏經) 게송에 이르기를,···

   백 천이나 되는 어리석은 중들은
   '지혜'가 없이 '고요한 마음'(靜慮)만을 닦거니와
   설사 백 천 겁을 지낸다 하더라도
   결코 '열반'을 얻음이 없으리라.

   총명 민첩하고 지혜로운 이라면
   능히 '법'을 (들음 없이) 듣고, '법'을 (말함이 없이) 말하므로
   잠깐만이라도 <생각을 거둔다면>
   반드시 빨리 '열반'에 이르리라.

 
그러므로 면전에 전개되는 모든 빛깔이나 소리를 다 그 전처럼 '보고 듣고 깨닫고 알고' 하되, 결코 그에 대하여 분별을 일으켜서 취사선택하는 일만 없다면, ··· 다시 말해서, 그저 「지금 있는 이대로인 것 같으면 빠르겠지만, 만약 얻어들은 바 지해(知解)에 의지하면서 조작(造作)을 일삼는다면 끝내 깨달을 분수는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