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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만법의 근원이므로, 크고 작은 모든 법이 '마음'을 벗어나서 홀로 세워지 는
일은 결코 없다. 따라서 '마음'을 깨치는 것은 곧 '온갖 법'을 깨치는 것이 된다. 때문에 달마(達磨)는 이르기를,
「'마음을 관하는'(觀心), 이 한 법이야말로 물·심 양면의 모든 현상을 가지런히 껴잡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일러 '가장 간명한 요체'(省要)라 한다」고 했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른바 '진리를 탐구함'(眞理探究)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을 들라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들의 의식구조(意識構造)가 안고 있는 이분법적인 지각기능(知覺機能)의 '국소적인 집착성'(局執性)을 꼽아야 할
것 같다. 본래 '참된 하나'(眞一)인 이 세계를 '온갖 이런 것'과 '온갖 저런 것'으로 식별(識別) 해 놓고는,
다시 이것을 좋고 싫은 범정(凡情)을 따르면서 취하고 버리고 하느라고, 그야말로 무시 이래로 지지고 볶고 하면서 답답하게
살아온 게 중생살이이고 보면, 바로 이와 같은 허망한 분별지혜를 다스려서 본래의 '참된 하나'로 돌이키는 것이야 말로
가히 '마음 공부'의 요진(要津)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요는 대개의 사람들이 이 '참된 하나'가 '하나'와
'여럿'의 포섭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이 쪽 저 쪽으로 갈라진 양변(兩邊)을 다시 '하나'로 되돌리기 위해 시설된, 이른바 불이법문(不二法門)이야말로
초심자에게 있어서는 가장 소화하기 어려운 난제 중의 하나였는데, 막상 이 고비를 넘기고 나면, 다시 "모든 법은 본래
'하나'"라고 하는 치우친 지견이 생겨나서 생병을 얻게 되므로, 다시 이것을 다스리기 위해 비일법문(非一法門), 즉
"하나조차도 아니라"는 약방문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결국 알고 보면, 모든 선지식들이 혹은 시중(示衆)을
하고, 혹은 방(捧)을 치고, 할(喝)을 하고, 주먹을 쥐어 보이고 하면서 갖가지 방편을 베풀어서 학인 들을 제접(提接)하기는
했는데, ― 만약 이와 같은 '방편'에 헷갈려서, 영리(?)하게도 무엇인가 '알아차린 바'가 있게 되면, 즉 '아는
바'(所知)가 생기면 곧 '능히 아는 마음'(能知)이 있게 되어서, 끝내 '분별지혜'(分別智)로 사물을 분별하는 버릇은
다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사람들이 부지중에 범하고 있는 오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 그것은 바로 애초에 모든
법을 두 갈래로 갈라놓은 원흉이 바로 '의식'인데, 이제 그 미혹을 다스리는 일을 바로 그 '의식'에게 전적으로 맡겼으니,
이것은 마치 좀도둑을 잡는 일을 강도에게 맡긴 꼴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인간이 안고 있는 또 하나의 외통수는, ―
우리들 인간이 저 바깥 세계와 교섭할 수 있는 경로가 바로 이 '의식' 이외에는 달리 길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결론부터 말해서, 지금에 열심히 인행(因行)을 닦아서 훗날 그에 상응하는 과보(果報)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인과법(因果法)이야말로 '주체'와 '객체' 사이의
상관관계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바로 '인식작용'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세속에서와 같은 유위행(有爲行),
즉 어떤 목표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유공용행'(有功用行)을 통해서는 결코 '참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한 것이며, 나아가서 「'진리'는 인간의 이른바 '합리적인 사유'로는 미칠 바가 아니라」고
했던 것이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부득이 결정적인 '사고의 전환'을 꾀하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아무리 '사고'를
전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사고'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실망할 일이 아니다. 궁하면 통하는 게 '도'라고 하지 않았던가. 실망은커녕, 바로 이렇게 나갈 수도
없고 물러설 수도 없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곳에 살 길(活路)이 있다 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럴 때 고인은 말하기를,
「그대 발뿌리(脚下)를 보라!」 고 했던 것이다.
··· 각설하고, ― 만약 어떤 사람이 경회루(慶會樓)에 앉아서 평생을 두고 '서울'로 가는 길을 묻고, '서울'로
가는 지름길을 궁리하고 하면서 살아 왔는데, ― 지금도 여전히 그 짓을 그치지 않고 있다면, 이럴 경우, 실상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무엇이라고 일러줘야 하겠는가? 이 때, 만약 그에게 일러주기를, "당신이 지금 앉아 있는 자리가
바로 '서울'인데 무슨 '길'을 또 묻는가?" 하고 일러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하여 이 말끝에, 그가 비로소 그
오랜 미망에서 문득 놓여 날 수 있었다면, 이야말로 지선(至善)한 천고(天鼓)의 울림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제 <이 '마음'이 그대로 '부처'요>(卽心卽佛), <이 '마음'이 그대로 '법'인 도리>
(卽心卽法)를 곧장 드러낼 단계가 된 것 같다. ··· 즉 '마음'이 있어서 '온갖 법' 에 '이름'을 붙였으므로,
'마음'이 없으면 모든 '이름'도 본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참 마음'(眞心)은 본래 움직임이 없고,
'망령된 마음'(妄心)은 이 '참 마음' 위에 나타난 허망한 그림자일 뿐이다」라고 말하여, 진·망(眞妄)을 둘로 나누어서
이야기 한 것도 모두 세간법에 의지한 방편의 말이었을 뿐이며, 마치 '물결'이 본래 '물'이 듯이, 이제 '참'도
'허망'도 모두 '한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가서 '하나'로 원융되어, 오직 여여한 '한 마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알아듣고 하는, 이것이 바로 '나의 마음'일 뿐이다. 이 '마음'을 일러서 '부처'라
하고, 이를 '대도'(大道)라고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신령한 깨달음의 성품'(靈覺性)인 것이다. 이 '신령한
깨달음의 성품'은 실로 나거나 사라지는 일이 없다. 이 '마음'은 본래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어서 이것을 이루기 위해
전혀 새로이 조작을 빌릴 일이 없으며, 또 본래도 깨끗하고 지금도 깨끗해서 새삼 윤이 나도록 닦기를 기다릴 것도 없다.
이것이 바로 나의 '성품' 이며, 이 '성품'이 본래 '열반'이고, 본래 '해탈'이며, 본래 '청정'이니, 이 '성품'이
본래 일체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 '성품'이 바로 '부처'니, '부처'가 어찌 다시 '부처'를 이루는 일이 있겠는가.
이 생멸 없는 영각성(靈覺性)으로서의 '나' 스스로가 <지금 있는 이대로> 본래 '금강
같은 선정'(金剛定)이어서, 다시는 특별히 '뜻'을 짓고, '마음'을 모두어서 '선정'을 취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설사 올올이 '마음'을 모두고 생각을 거두어 서 착실히 지어 얻는다 하더라도, 역시 이것은
눈(雪) 위에 다시 서리(霜)를 더하는 격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모든 법'은 다만 생각하고 분별하는 데서 생길 뿐이니, 그러므로 문득 '마음'을 거두면 '모든 법'은 본래
없는 것이다. 대저 '돌아간다'는 것은 곧 '한 마음의 근원' 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마음'은 곧
'만 가지 덕'(萬德)이 돌아갈 데니, 따라서 모든 것을 '마음의 근원'으로 돌리면 다 잘 이루어진다.
따라서 화엄경의 십현문 (十玄門)도 유심회전선성문(唯心廻轉善成門)으로써 그 도미를 장식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고인이
이르기를, 「모든 법이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아직 평등하지 않다」고 했으니, 일체의 상반(相反)
상극(相剋)하는 법이나, 상즉(相卽) 상입(相入)하는 법이나, 이 모두를 '마음의 근원'으로 돌린다면, 그 모두가
'하나'로 원융되면서 곧장 <무여(無餘)의 경지>에 들게 된다.
결국 알고 보면, 미혹하는 것도 마음만으로 미혹하고, 깨닫는 것도 마음만으로 깨달으며, 속박되는 것도 마음만으로 속박되고,
풀려나는 것도 마음만으로 풀려나는 것이니, 그렇다면 깨닫는 것도 해탈을 얻는 것도 오직 <마음을 깨치는 일>말고는
달리 기대어 볼 데가 없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제 문득 회심(廻心)하여 '마음의 근원'을 밝힌다면,
깨달음도 미혹함도, 속박도 해탈도 그 모두가 본래 아무 일도 없이 고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음이 나면 모든 법이
있고, 마음이 없으면 모든 법이 없다. 이와 같이 '있고 없음'까지도 전혀 <한 찰나 한 생각>에 달려
있는 것이니, 그것이 무슨 법이길래 빙소와해(氷消瓦解)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유심(唯心)의 도리'를
최상승의 법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시비득실(是非得失)에 얽매인, 지금의 이 '무명의 중생심'인 채로, 이 '마음'에 즉(卽)하여
'부처'를 본다면, 가위 '현재의 몸'에서 바로 '도'를 이룰 것이니, 공부에 뜻을 둔 이라면 다시 무엇을 더 망설이겠는가.
문자 그대로 시간 도 노력도 밑천도 들임이 없이, 몰록 '부처 땅'을 밟을 것이니, 본분납자(本分衲子) 라면 모름지기
'발뿌리'를 잘 살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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