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참된 공부'는 높고 수승한 자리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학인이 도달해야 할 궁극의 목표가 아니다.
   

'진리'(眞理)는 그 말의 뜻 그대로라면, '참된 이치'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만약 '참된 것'만이 '진리'이고, '참되지 않은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진리'일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보편성(普遍性)으로써 근본을 삼는다」 는 '진리' 본연의 취지에 우선 어긋나기 때문이다. 또한 '칸트'의 말투를 빌리자면, "진리는 참되다"고 말해도 벌써 '참되다'는 이름의 때(垢)가 묻은 셈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진리'는 결코 인간의 합리적인 사유를 통해서는 설명될 수도 없고, 이해될 수도 없으며, 따라서 탐구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왜 그렇겠는가? 온갖 것이 다 '진리' 아님이 없다면, 어찌 '진리'로써 다시 '진리'를 구하겠는가?
 
불가(佛家)에서는 이 '진리'에 해당하는 말에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을 줄여서 보통 '보리'(菩提 Bodhi '보리'는 우리 나라에서 쓰는 속음이다)라고 부르며, 이것으로써 '부처 지혜'를 삼는다. 그리고는 경전에 이 '보리'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보리'가 '보리'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 에 이것을 '보리'라고 한다」 고 했다. 그렇다면 이 '보리', 즉 '부처의 지혜'는 세속의 모든 '이름과 뜻'(名義), 그리고 일체의 '이치'나 '도리'를 본래 벗어나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보리', 즉 '부처 지혜'의 나툼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부처 지혜'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 는 뜻이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여기서 '보리'나 '부처 지혜', 그리고 '진리'라는 말들이 모두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고, 이 모두가 본래는 이름이 없는 <궁극적인 '참된 하나'>가 서로 다른 이름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만약 여러분이 「'진리'는 본래 스스로 환히 안다」 는 말을 들었다면, '진리' 에 대한 종전의 이해가 대폭 수정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진리'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 「'진리'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그래서 도저히 헤아려 알 수가 없는, 저 아득히 높은 데 있는 '절대(絶對)한 것'인데, 우리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이 '진리'에 접근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자기 완성'을 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인 것 같다. 아마도 이 같은 생각은 인류 역사와 그 연원(淵源)을 함께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진리'가 어떤 것인지 알 수조차 없다면 어떻게 '진리'를 탐구할 수 있을까? 또 어째서 '진리'는 인간이 생각으로 헤아릴 수조차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 우리는 여기서 예사 방법으로는 도저히 풀릴 성싶지 않은 이 화두의 매듭을 일단은 옆으로 치워놓고, 전혀 다른 출발점에서 새로 시작해 보기로 하자. ― 우리들은 어릴 적에, 밤하늘에 희뿌옇게 가로 비낀 '은하수'를 쳐다보면서 어른들한테 견우 직녀의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날 것이다. 그런데 어른이 된 지금도 어쩌다 '은하수'라는 말을 들으면 문득 저 높은 하늘가 를 떠올리는 자신을 보게 된다. ― 지금 나 자신이 서 있는 <이 자리>가 바로 '은하수'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말이다. 어찌 그뿐일까? 지금에 이와 같은 생각을 또렷또렷하게 굴리고 있는
<나 자신>이 바로 '은하수'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진리'라는 것이 우리들의 손이 닿지 않는, 아득히 높은 저 먼 곳에 있는 '절대한 그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어떻게 우리들의 마음에 자리잡게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실마리를 잡은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마음'이 그대로 '부처'니라」 하는 말이나, 「그대 자신이 곧 '부처'니라」 하는 등의 말들이 성큼 가까이 피부에 와 닿을 만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좀처럼 지난날의 그 고질적인 망상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 같다. 그리하여 마침내 '불법 공부'에 뜻을 두고 열심히 수행하고 있다는 사람들 조차도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오묘하고 그윽한 탐구'(探玄)를 통해서 끝내는 대각(大覺)을 이루어, '진여법성'(眞如法性)에 계합함으로써 '성불'하리라」고 생각 하면서, 허구한 날 <'수혹'(修惑)의 미망(迷妄)>에서 헤어날 줄 모르니 참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화엄경(華嚴經) 입법계품(入法界品)에 보면, 선재동자(善財童子)가 53선지식을 찾아보는 대목마다 그 첫머리에 ― '선재'는 이미 '보리심'을 발(發)하고, ― 하는 말이 꼭 되풀이해 나오는 것을 본다. 여기서 "보리심을 발했다"는 말은, 이것을 다시 줄여서 "발심했다"고들 보통 말하는데, 그렇다면 앞서도 이미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발심했다'는 말의 진정한 뜻은 ― 아무것도 구할 것이 없고,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는 마음으로 ··· 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즉 선재동자가 비록 여러 선지식을 두루 친견하기는 해도 전혀 '구하는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아직 완전히 다하지 못한 여습(餘習)을 다스림으로써 청정한 '본래 마음'을 밝히고자 함일 뿐, 결코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거듭해 강조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고인들은 공부하는 사람이 치성하게 밖으로 내달으면서, '법'을 구하고, '부처'를 찾아 헤매는 것을 보면, "아직 '발심'도 제대로 하지 못했구나" 하고 핀잔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니 공부하는 사람이 아직도 '제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고 마음이 늘 밖으로만 내닫는다면, 어찌 「'마음'이 곧 '법'이요」, 「'마음'이 곧 '부처'인 도리」를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공연히 이 '몸'과 '마음'을 수고롭게 하면서 헛되이 밖으로 치구(馳求)하는 일은 지금 당장에 그만 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