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참된 공부'는 높고 수승한 자리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공부'는 서방정토(西方淨土)를 구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인간의 삶이란 알고 보면, 보다 살기 좋고, 보다 행복한 삶을 위한 노력의 연속이 아닌가 한다. 보다 안정되고, 보다 쾌락하고, 보다 편안한, ··· 이와 같은 이른바 '행복의 조건'들을 충족시킬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것이 범부의 근성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나날이 허덕이면서 살다 보니, 되는 일은 별로 없고, 미래에 대한 전망도 별로 신통치 않고, 그래서 세상살이의 엄청난 무게에 견디다 못해서 궁리 끝에 찾아든 것이 바로 '불법의 문'(佛門)을 두드린 게 아닐까? 너무 얕잡아 이야기한다고 심사가 불편한 사람도 있겠지만, 가만히 따지고 보면,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날 게 없을 성싶다. 그리하여 당대에 대각(大覺)을 이루어서 성불(成佛)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만약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금생에서 열심히 갈고 닦아서 이른바 미래의 지상낙원이라는 서방정토(西方淨土)에라도 태어나기를 바라는 게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미칠 때마다 늘 절실히 느끼는 일이지만, ― 자기구원(自己救援) 을 위해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수행길에 나선 이들이 현세적인 미혹 때문에 길을 잘못 들어서 헛애만 쓰고 있다면 이 보다 더 딱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것은 마치 '동쪽'으로 가야 할 사람이 방향을 헷갈려서 '서쪽'을 향하여 내닫고 있는 형국이나 다름없으니, 참으로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을까? 이 문제에 대한 깊은 논의는 다른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간단히 요점만 짚고 넘어갈까 한다. ― 대저 정토(淨土)란, 불국토 (佛國土) 즉, '부처의 세계'를 이르는 말이다. '중생의 세계'는 온갖 번뇌로 가득 찬 '더러운 땅'(穢土)인데 비해서 '부처의 세계'는 일체의 번뇌가 없는 깨끗한 곳 이라는 뜻으로 '정토'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전에 보이는 이와 같은 말들은 모두 세간법에 빗대서 한 방편의 말임이 분명하다. 적어도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여 '제 마음'을 깨친 '대보살'이라면 훤칠하게 '지혜의 몸'(慧身)이 드러날 터인데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로 된 허망한 국토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러나 아직 '마음'을 깨치지 못한 사람이면 여전히 이 '국토'에 의지해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에 이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불국토'의 개념이 인용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정토' 앞에 '서방'이라는 말이 붙었을까? 고석(古釋)에 보면, 서(西)는 서(棲)에 통하는데, 이 서(棲)는 <저녁에 새들이 돌아가 깃들어서 쉬는 보금자리>라는 뜻이라 한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본래의 성품'을 깨달아서 영원히 적멸락(寂滅樂)만이 가득한 본향(本鄕)으로 돌아가서 쉰다는 뜻으로 쓰인 말인데, 이것이 마치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극락세계(極樂世界)가 서방(西方)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밖에도 서(西)쪽과 함께 동(東)쪽이라는 말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도 음미해 볼 만하다. 즉, 해가 뜨기 이전의 동쪽은 미명(未明)의 뜻이 있으며, 이 <미명의 어둠>이라는 개념은 '밝음'의 상대 개념으로서의 '어둠'이 아니라, 경전에서 흔히 보이는 '검을 현'(玄) 자와 더불어서, 인간의 혜명(慧明)이 아직 드러나기 이전의 '현묘(玄妙)한 깨달음', 즉 무수히 많은 허망한 지견들로 말미암아 인간의 마음이 물들기 이전의 '청정한 본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쓰인 개념인 것이다. 때문에 <각성(覺城)의 동쪽>이라는 말도 있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비유의 참뜻을 알지 못하고, 그저 이 세상의 방위(方位)로서의 동쪽 서쪽으로만 안다면 어찌 눈밝은 사람들의 빈축을 사지 않겠는가.
 
이와 관련해서, 성서(聖書 Bible)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는 것을 본다. 즉, '에덴 동산'(Garden of Eden)이 그것인데, 이것이 모두 처음으로 창조된 남녀인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의 명령 을 거역(拒逆)해서 추방당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으로서, 이른바 <지상낙원>을 가리키는 말이며, '에제키엘'(Ezekiel 구약성서의 예언서)에는 '하느님의 동산'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에덴'이라는 말의 어원은 '아카드어'(Akkad 고대 아시리아-바빌로니아어) 의 '에디누'(edinu), 즉 '평지'(平地)에서 온 말로서, '평화롭고 고요한 땅'이라는 뜻이라 한다. 즉 인간의 마음 속에 선·악(善惡), 시·비(是非), 득·실(得失) 등의 서로 상극하는 대립개념이 생겨나면서 끊임없이 서로 미워하고 다투고 하기를 그치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에서의 죄도 없고, 죽음도 없고, 그저 행복하고 평화롭기만 하던 삶을 스스로 등지고, <죄와 불행과 죽음을 아는> 현재와 같은 '인간의 세계'로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 모두가 죄업과 번뇌로 얼룩진 현재의 '인간 세계'에서 벗어나서 '신의 세계' '부처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으로 요약되는데,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법의 평등'을 깨달음으로써 그 마음 속에서 '선과 악', '죄와 복', '삶과 죽음' 등의 대립개념이 항상 서로 다투는 양상을 영원히 해소하여, 마침내 청정한 '본래 마음'을 되찾아야 한다는 뜻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그러기에 선현들도 이르기를, 「그대 마음이 청정하면 바로 지금 이대로가 '불국토'니라」 고 했던 게 아니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이 이 깊은 뜻을 살피지 못하고, 매양 현재의 이 드러난 세상에서 악(惡)을 배제한 선(善), 허망(妄)을 배제한 참(眞), 미움(憎)을 배제한 사랑(愛) 등을 현실적으로 실현하는 것으로써 이 땅에 '부처의 세계'나 '신의 세계'를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여기는, 전혀 뒤바뀐 집착을 일으켜서 그것을 마치 '성스러운 가르침'(聖敎)을 실천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현실참여적인 종교인의 양심」이니, 「이 땅에서 '악'의 뿌리를 뽑아내는 것이야말로 성직자에게 주어진 가장 숭고한 사명이라」느니 하면서 좌충우돌하기를 서슴지 않으니, 세상은 더욱더 어지럽고 시끄러워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본래 '선과 악'은 서로 의지해서 세워진 개념이기 때문에 '악'이 없으면 '선'도 있을 수 없고, 그 반대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악'을 완전히 소탕하고 '선'만이 있게 하려는 생각은 애초부터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며, 그러기에 원효대사도 이르기를, 「삼·칠 정도가 적당하니라」고 했던 게 아니겠는가?

모름지기 '진실한 법'은 '지금의 것'을 바꾸어서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일은 없다.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사람들의 삶이 고생스러운 것은 지금의 것과는 다른 그 어떤 것이 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즉 '범부'를 바꾸어서 '성인'이 되고, 불각(不覺)을 바꾸어서 정각(正覺)을 이루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 다만 '지혜'가 없어서 ― <지금 있는 이대로의 것>이 어느 것 하나도 '불사'(佛事) 아님이 없고, '참된 성품'(眞性)의 응현(應現)이 아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모든 '법의 성품'이 본래 비어서, 고·락(苦樂)도 생·사(生死)도 모두 중생의 허망한 분별심으로 지어진 것일 뿐, 본래부터 전혀 '한 성품'(一性)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는다면, 지혜로운 이가 어찌 같은 것을 가지고 서로 다투겠는가?
 
바꾸어 말해서, 스스로는 편안히 잠자리에 누어서 잠을 자고 있으면서도, 다만 꿈속에서 악몽에 시달리느라고 마냥 몸부림을 치고 있는 꼴인 것이다. 그러다가 고통이 극에 달한 끝에 후딱 꿈에서 깨고 나면 어떻겠는가? ― 그 동안 꿈속에서 겪었던 모든 일들은 본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흔히들 거창하게 추켜드는 이른바 '깨닫는다' '깨친다' 하는 등의 말들은 모두 수천만 년 동안 계속되어온 이 지겨운 꿈에서 몰록 '깨어나라'는 뜻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 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석가(釋迦)의 문하에서 '많이 알기로 으뜸'(多聞第一)이라는 평을 듣고 있었던 '아난'(阿難)조차도 '석가'의 법통(法統)을 이어받은 '가섭'(迦葉)으로부터 「저 산문(山門) 밖의 찰간(刹竿)을 쓰러뜨리라」는 핀잔을 들었던 것이다.

 제자가 스승에게 묻는다.
  「저는 어째서 '열반'을 얻지 못합니까?」
  「생사심(生死心)으로 구하기 때문에 그렇니라.」
  「어떤 게 '생사심'입니까?」
  「그렇게 '열반'을 얻으려고 애쓰는 마음이 바로 그것이니라.」

여러분, 「'번뇌'가 그대로 '보리'요」, 「'생사'가 그대로 '열반'이라」고 한 말을 깊이 깨달아 살펴서, '온갖 것'을 다 거두어 몽땅 '한 마음'의 근원으로 돌린다면 "당대에 기필코 성불하리라"는 말이 어찌 헛된 말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