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사람들에게 법사(法師) 소리를 듣는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이야기 끝에 '공부'
하는 일에 이야기가 미치자 한다는 소리가, 「나름대로 열심히 '마음 공부'를 하기는 하는데 좀처럼 성취가 없습니다.
'자기 완성'을 위해 앞으로 더욱 노력해야지요.」 하는 것이었다. 언뜻 듣기에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여러분, 이 말 가운데는 지나칠 수 없는 '어김 문'(負門)이 있으니, 눈밝은 학인 이라면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불법 공부'는 '자기 완성'을 위하는 공부가 아니라, 오히려 굳이 말하자면 '자기 부정'의 과정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흔히 이 세상에서 '자기도야'(自己陶冶)에 힘쓰는 사람들을 보면, 나날이 성현들의 훌륭한 덕성을 본받아서
힘써 탁마(琢磨) 하는 일방으로, 끊임없는 '자기 반성'이나 '자기 비판'을 통해서 허물을 다스려 나가는 것으로써
수양(修養)을 삼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불법'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수행무용론(修行無用論)을
펼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와 같은 유위행을 통해서는, 설사 제아무리 훌륭하고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거기에 '불법'은 없음을 밝히는 것이다.
만약 그가 진정한 본분납자(本分衲子)라면 결코 '본분'(本分)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볼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본분'이란 과연 무엇일까? 자기 존재의 근본으로서의 '본분'은 결코 움직이는 일도
없고 움직이지 않는 일도 없다. 어째서 딱히 "움직이지 않는다"고 잘라 말하지 않고, "움직이는 일도 없고, 움직이지
않는 일도 없다"고 어정쩡하게 말하는 것일까 하고 혹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 '본분'은
결코 동·정(動靜)의 포섭이 아니기 때문이다. ― 이 같이 스스로 온전히 이루어져서, 오직 순일한
허공성일 뿐인 이 '신령한 성품' 은 본래 온갖 법을 여의었기 때문에, 그 가운데는 '귀한 것'도 '천한 것'도 없고,
'훌륭한 것'도 '하찮은 것'도 없으며, 나아가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 이렇게 스스로는 '정한 성품'도 없고,
'작용'도 없으면서, 다만 항상 '머무름이 없는 인연' (無住因緣)을 지을 뿐이다. 마치 음성을 따라 메아리를 나투듯이
말이다. 인연을 따르면서 변하고 옮기고 하는 것은 '자체의 성품'이 없는 것이므로 결코 이것을 '실다운 존재'(實有)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며, 오직 인연으로 말미암아 변하거나 옮기거나 하는 일이 없는 것이라야 바야흐로 비로소 "참되다"(眞實)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 '움직이는 몸'과 '움직이는 마음'을 붙잡아서 '나'로 삼고 있는 한, 이 '나'는 마치 허깨비 같은
존재이므로 이를 환화공신(幻化空身)이라고 하는 게 아니겠는가? 우리 인간들은 이 허깨비와 같은 존재를 '나'인 줄로
오인하여 집착 하기 때문에 업을 짓고, 생사(生死)를 받게 되는 것이며, 이 근본무명(根本無明)을 깨끗이 떨쳐버리고,
― 더 정확히는, 「이 '근본무명'이 그대로 '부처 지혜'임」 을 분명히 깨달아 알아서 ― 아무런 유위의
조작도 없이, 본래 스스로 여여부동 (如如不動)한 '참 나'(眞我)를 되찾음으로써 영원히 일체의 분별과 집착을 여의고,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참 삶'만이 있는 진여법성(眞如法性)에 잠잠히 귀착(歸着) 하는 일이야말로 여래의 일대시교(一代時敎)의
'벼리'인 것이다.
따라서 헛되이 '현상의 행'(現象行)을 일으켜서 성인의 국량(局量)을 탐내어 갖추기를 바라면서, <입도(入道)
순간의 '구경의 깨달음'(究竟覺)>을 얻기 위해 온갖 유위의 노력을 기울인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邪道)를
행하는 것이니, 끝끝내 '참된 깨달음'을 얻는 일은 없다. 그런데 지금 공부하는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이 유위의
수렁에 빠져서 헤어날 줄 모르니, 참으로 놀랍고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옛 어른들도 말하기를, 「지금
이대로인 것 같으면 빠르겠지만, 만약 헛되이 조작을 일삼는다면 다시 삼천 년은 좋이 기다려야 하리라」고 했던 게 아니겠는가.
따라서 본분도량(本分道場)의 본분선지식(本分善知識)이라면 학인들이 항용 의지하고 있는 일체의 '방편'을 빼앗아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전통 있는 '수행법'이라 하더라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참된 본분납자(本分衲子)라면 <지금 있는 이대로의 '나'>가 항상 '함이 없는 바른 자리'(無爲正位)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 알아서, '중생의 자리'가 바로 '부처의 자리'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음을 철저히 깨달아
사무칠 일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헛되이 밖으로 내달으면서, 보다 '나은 자리', 보다 '훌륭한 자리',
보다 '대단한 자리'를 추구하여 마지않는다면, 이 사람은 '마음' 밖에 '법'을 보는 것으로서, 전혀 '마음 법'을
알지 못하니, 어느 세월에 <'마음'이 바로 '부처' 인 도리>를 깨달아 알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마음'이라는 것도 정한 성품이 없어서, 결국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경계'도 아니라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은 사람이라면 천지간에 의지하고 머물고 할 만한 곳이 도무지 없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순일(純一)한
허공성'으로 서의 본분(本分)인 것이다. 이 '본분'을 등지는 일 없이 온갖 법을 능히 굴리는 것이 바로 '여래의
행리(行履)'이므로, 따라서 참된 선지식은 학인으로 하여금 이 '의지함이 없고 머무름 없는 성품'(無依住性)을 허물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 거의 유일하게 선지식이 학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사실 선지식은 학인을 위해 특별히
일러줄 단 한마디의 말도 없는 것이다. 때문에 경에 이르기를, 「'참된 설법'(眞說)은 설함도 없고 보임(示)도 없으며,
'참된 들음'(眞聞)은 '들음 없음'으로써 '들음'을 삼는다.」고 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