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참된 보임(保任)'은 '익힐 것'도 '지킬 것'도 없다.
     
   

대저 '익힌다'는 말이나 '훈습(薰習)한다'는 말은 새로운 '업'을 길들인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에 「공부를 익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이것을 마치 새로 얻은 '지혜'나, 새로 터득한 '재간'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잘 보존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이야말로 눈을 번히 뜨고 귀신 굴로 들어가는 꼴이니, 참으로 삼가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대목이다.
― 내내 '나'와 '내 것'이라는 완고한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애쓰다가, 어느 날 문득 인공(人空) 법공(法空)의 깊은 도리를 깨닫고는 이 <'나'와 '내 것'에서 벗어나려는 희망>까지 몽땅 놓아버려서, 깨끗이 신명(身命)이 다해 버렸다면 어떨까? ― 아마도 이쯤 돼야 비로소 진정한 '보임'의 뜻 을 알게 될 것이다.

어쨌거나, 처음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던지는 질문은 아마도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어떻게 익혀야 하는가?" 등일 것이다. ― 인식작용 과정의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에 대해서는 이미 밝힌 바가 있으니, 중복되는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고,
― 이 때 흔히 묻기를, 「'견분'과 '상분' 가운데 어느 것을 훈습해야 하는가?」 하고 묻는 것을 보는데, 이미 밝혔듯이 '상분'은 다만 업식(業識)의 그림자일 뿐이어서 전혀 실다운 존재가 아니므로 당연히 이것은 훈습 여부를 논할 여지조차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면전의 '티끌 경계'(塵境)가 '제 마음'에 나타난 전혀 허망한 그림자임을 알지 못하고, 이 꿈속에서 보는 바와 같은 현상을 실다운 존재로 보기 때문에, 이 가운데 혹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이것을 마땅한 것으로 바꾸려고 하든가, 아니면 좋고 싫은 범정(凡情)을 따르면서 취사선택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늘 '마음 그릇'이 부서져서 도무지 편안할 날이 없다. 말하자면 시종일관 허망한 '상분'만을 다루면서 헛되이 마음을 수고롭게 하는 게 사람들의 일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상분'이 문제가 아니고, 즉 허망한 그림자와 쓸데없이 싸울 게 아니라, 이것을 오인해서 헛되이 집착을 일으킨 '견분'에 바로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상대 경계'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보고 있는 '내 마음'이 전적으로 문제라는 말이다. 일이 이에 이르고 보면, 「그대가 '그렇다'고 했기 때문에 그렇고, 그대가 '그렇지 않다'고 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한 '붓다'의 말은 으레 그렇다 치고, 우리 조상들의 「세상 만사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한 그 육두문자와도 같은 말이 더욱 절실히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이다. 그러기에 고인도 이르기를, 「'상분'은 걱정하지 말고 오직 '견분'을 훈습할 뿐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일련의 상세한 설명을 충분히 이해하고, 또 깊이 수긍하면서도, 사람들의 마음은 여전히 밖을 향해 삿대질하기를 멈추지 않으니, 그 업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새삼 절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니 공부하는 사람들이 몇 마디 말이나 알아들었다고 해서, 섣불리 목에 힘을 줄 일이 아니라는 것을 뼈 아프게 통감해야 한다. ― 그러나 비록 그렇더라도 참구(參究)를 그만 둘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 새삼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살펴보자. 도시 '보는 바'(所見)가 있어야 '능히 보는 마음'(能見)이 있을 텐데, 이제 '소견'인 '상분'이 이미 그림자와 같아서 '볼 만한 것'이 도무지 없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견분'이 홀로 세워질 수가 있겠는가? 왜냐하면 이 능·소(能所)는 본래 불가분의 것으로서, '능'(能)이 있어야 '소'(所)가 있고, '소'가 있어야 '능'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서로가 서로 에게 의지해서 존재하는 것을 '인연법'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인연'으로 있는 모든 것은 낱낱으로는 '제 성품'이 없다는 것은 이미 밝힌 바이다.

이와 같이 겉으로 보기에는 능·소가 분명히 있는 듯하나, '능'도 '소'도 모두 '제 성품'이 없고, 따라서 작용도 없음을 분명히 깨달아서, 그 마음에 능·소의 자취가 다하면 이것을 일러서 '정각'(正覺)을 이루었다고 한다. 곧 '정각의 마음' 에는 자·타(自他)도 없고, 능·소도 없고, 일체의 상대가 끊어져서 결국 '마음'도 없고 '경계'도 다 없어서, 모든 법이 도무지 붙을 데가 없다. 그러므로 한 법도 알 만한 법도 없고, 설명할 만한 법도 없으며, 기억해야 할 만한 법도 없고, 이해해야 할 만한 법도 없으며, 나아가서 '나'도 없고 '내 것'도 없는데 ··· 그렇다면 과연 <누가> 있어서 <무엇>을 익히고 보존하겠는가?
 
그런데 이와 같은 말을 들으면 영리한(?) 사람은 곧 그럴싸한 지견을 일으키면서 말하기를, 「그래! 온갖 것이 그저 하나의 허공성일 뿐인데, '누가' 있어서 '무엇'을 익힐 게 있겠는가. 다 부질없는 일이다.」 하면서 그저 질탕하게 나날을 헛되이 보내기 일쑤이다. 이런 망령된 지견에 사로잡히는 데는 또 다른 그럴 만한 까닭이 있기도 하다. ··· 어느 날, 날마다 구성지게 염불을 외이고, 늘 꼿꼿하게 앉아서 근엄한 자세로 좌선을 하고, 육바라밀을 닦고 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용맹정진하는 중을 보고, 노 스승이 딱한 듯이 말하기를,
  「그렇게 날마다 몸과 마음을 달달 볶아 가지고서야 어떻게 무심도인(無心道人)의 경지를 기웃이나 해 볼 수 있겠는가?」 하니, 중이 되묻기를,
  「저는 그렇거니와, 그러면 스님께선 어떠하십니까?」
  「나는 그저 배고프면 밥을 먹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고, 졸리우면 잠을 자면서 이리 질척 저리 질척, 그럭저럭 한 세상을 보내는구나.」 ···

이와 같은 간곡한 말씀들이 우둔한 중에게 또 어떤 지견을 내게 했을까?

요컨대, '닦는 자'도 '닦지 않는 자'도 모두 깨치기는 글렀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 정진바라밀(精進波羅密)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한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으뜸가는 '정진'이니라」 했던 것이다.
 
또한 법집경(法集經)에서는 이르기를, ···
『 보살은 '모든 법'을 수호할 필요가 없나니, 모름지기 보살은 오직 '자기 마음' 을 잘 수호할 뿐이다. 』라고 했다.
 
그렇다면 '제 마음'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 ― 이것이 말이 쉽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 ― 요는 '제 마음'의 작용 없는 '본래 성품'을 철저히 깨친 사람만이 아무 노력도 시간도 들임이 없이, 그저 <지금 있는 이대로의 '제 마음'>을 잘 보존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본래 <그 자리>를 여의었던 적도 없고, 지금도 여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 자리>를 여의는 일이 없을 것임을 분명히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면 여전히 허망한 지견을 일으키면서, 다시 유위행에 떨어질 게 뻔하다.
 
요컨대, 지금 이렇게 묻고, 대답하고, 따지고, 알고 하는 이 '마음'은 일찍이 난 일도 없고, 따라서 사라지는 일도 없어서, 항상 여여할 뿐이니, 그러므로 전혀 갈고 닦고 할 것도 없이 <지금 이대로인 채로> '금강 같은 선정'(金剛定)임을 깨쳐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여기에 다시 유위의 조작을 일삼는다면, 이야말로 「교(敎)에 다시 '교'를 짓는다」는 경책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만약 이렇게만 볼 수 있으면 곧 '평등심'을 얻고, <다시는 어떤 법도 얻는 일이 없어서>(無所得) '평등' 이외에는 도무지 '차별법'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차별법의 성품'을 환히 아는 것이 바로 '평등'이기 때문이다. 이 '평등법문'에 들면 일체법은 모두 '성품'이 공한 줄 알아서, 일체의 애증심을 내지 않게 될 것이며, 이것이 곧 신명(身命)을 버리는 곳이 아님이 없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