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아무리 훌륭한 일도 일 없음만 못하다.
     
   

대저 「중생이 미했다」고 하는 것은 '지혜'가 없고 '덕'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다만 '제 성품'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미했다"고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항상 스스로 청정하고 적멸(寂滅)하여 '성품'도 없고, '모양'도 없어서, 오직 '참된 하나' (眞一)일 뿐인, 그러면서도 인연을 따르면서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온갖 법을 나투되 전혀 자취가 없는, 이 '참 성품'(眞性)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미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만약 이 미·오(迷悟)의 참 뜻을 알지 못한다면, '불법 공부'를 하면서도 으레 '미혹함'을 여의고 '깨달음'을 얻으려는 바람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과법'에 철저히 갇혀 있는 그의 안목으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일체법이 '성품'이 모두 비었고, 따라서 '인'도 '과'도 다 비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 업의 뿌리가 완전히 다해 마치기 전에 는 여전히 분별지혜로 사물을 간택하는 버릇은 좀처럼 쉬지 못하는 법이다.
 
만약 공부하는 사람이 이 '깨달음'과 '미혹함'이 다 '성품'이 비어서 본래 '한 바탕' 일 뿐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깨닫지 못하고, 그리하여 그 '한 바탕'인 '마음의 근원' 으로 모든 것을 돌릴 생각을 하지 못하고, 여전히 그저 세간법의 흐름을 따르면서 '깨달음'을 얻으려는 헛된 갈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는 결코 '올바른 믿음'도 낼 수 없을 뿐 아니라, 끝내 '올바른 발심'을 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공부는 속절없이 유위행(有爲行)으로 시종하면서 끝내 '성스러운 뜻' (聖旨)에 상응할 날이 없을 것이다.

요는 이 '참 성품'이 항상 온갖 차별법 밖에 벗어나 있으면서, 동시에 한결같이 모든 법의 의지처(依支處)가 되고 있기 때문에, 온갖 차별상은 그 모양이 비록 천태만상으로 서로 다른 '모습'(相)을 띠고 있을지라도 그 '성품'은 '참된 하나'를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마치 황금으로 만든 그릇들은 비록 모양도 다르고 쓰임새도 다르지만 그 모두가 다 황금으로써 성품을 삼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모든 법은 '성품'이 비어서 본래 '한 성품'(一性)일 뿐이요, 따라서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항상 같고, 비록 같으면서도 항상 서로 다른 것이니, 이것을 일러서 동이법문(同異法門)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이 '동이법문'의 미묘한 뜻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만 겉으로 드러난 차별상만을 좇으면서 '아름답다' '추하다', '훌륭하다' '하찮다', '이롭다' '해롭다' 하고 분별을 일으키다가, 마침내 문득 '좋고 싫은' 망정(妄情)이 일어나기만 하면 취하고 버리고 하면서 어지럽게 설치게 되는 것이다. 눈밝은 사람이라면 어찌 같은 것을 가지고 서로 다투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조삼모사(朝三暮四)를 싫어하고 조사모삼 (朝四暮三)을 기뻐하던 그 사촌들과 무엇이 다를 게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많은 선지식들이 학인을 제접(提接)하면서 베푼 숱한 방편들은 과연 상수리나무 열매로 원숭이들을 다루던 사람이 사용했던 조삼모사(朝三暮四)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 것이었을까? 이것은 진실로 우스개가 아니다.
 
삼조 승찬(三祖僧璨)이 신심명(信心銘)에 이르기를, 「'지극한 도'(至道)는 어렵지 않으며, 오직 간택(揀擇)함을 꺼릴 뿐이노라. 다만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만 없다면 텅 트여서 명백하리라」 하는 대목이 있다. 이 말은 곧바로 '선리'(禪理)의 추기(樞機)를 아주 간명하게 드러낸 말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명구(名句)도 듣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서는 그 본래의 뜻이 전혀 엉뚱하게 왜곡되기 일쑤이니, ··· 결국 말을 좇고, 멋대로 뜻(義)을 지어서 지견을 이룬다면, 열이면 열이 다 '마구니의 굴'에 떨어질 게 뻔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우리 인간들이 사물을 관찰하고 따지고 궁리하고 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된 유일한 연장인 의식(意識)이 본래 구조적으로 그렇게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의식'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미로(迷路)로 이끌고 가는지를 한 번 찬찬히 살펴 보기로 하자. '의식'은 우선 위와 같은 말을 들으면 이것을 일반화(一般化)하고 유형화(類型化)하고 범주화(範疇化)하여, 기왕에 형성되어 있는 '개념의 틀'(鑄型)에 맞도 록 분류하고, 명명(命名)한다. 그런 다음에는 기존의 판단기준(判斷基準)이나 가치기준(價値基準)에 따라서 이미 분류되고 명명된 낱낱의 존재에 대한 자리매김(位相)을 하게 되는데, ― 이와 같은 과정이 거의 동시에 대단히 빠른 속도로 이루어 진다. 가령 앞의 말을 예로 들어서 추려 본다면, ··· '간택(揀擇)함'과 '간택하지 않음', '애증심(愛憎心) 있음'과 '애증심 없음', '통연명백(洞然明白)함'과 '통연명백하지 않음' 등으로 갈래를 지어놓고는, 그 두 갈래 중에서 '간택하지 않음'과 '애증심 없음'과 '통연명백함'을 취하여 '옳은 것'으로 삼고, 이내 이것들을 성취하기 위하여 유위의 노력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비록 표현은 달라졌지만 그 하는 짓은 여전히 분별적인 망식(妄識)이 가면(假面)만 바꾸어 쓰고 나타나서는, 과거와 똑같이 분별과 간택을 일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는 '간택'이 없고자 하는 '간택'이야말로 한층 더 우심한 '간택'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조주(趙州)가 시중(示衆)할 때, 이 '신심명'의 화두를 들고(拈) 말하기를, ···
  『 '지극한 도'(至道)는 조금도 어려움이 없으나, 다만 간택(揀擇)하는 것을 꺼릴 뿐이다. 겨우 한 마디라도 '말이 있기만 하면' 벌써 '간택'이요, '명백'이다. 나는 '명백함' 속에도 있지 않으니, 그대들은 그래도 나를 지키고 아껴 주겠는가? 』 라고 했다. 이 때, 어떤 중이 묻기를, ···
  『 이미 '명백함' 속에도 있지 않다면 아낄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 나도 모르겠노라. 』
  『 화상께서 모르신다면 어째서 '명백함' 속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까?』 하니, 선사가 말하기를, ···
  『 이제 문답은 됐으니, 그만 절이나 하고 물러가라. 』 했다고 한다.

 천동각(天童覺)에게 어떤 중이 묻기를, ···
  『 조주가 말하기를,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으나 ··· 아껴주겠는가?」 했는데,
조주가 <명백한 속에도 있지 않다>면 어디로 갔습니까?』
  『 항상 엿볼 구멍이 없고, 어디서나 광망(光芒)이 끊겼느니라. 』
  『 조주의 뜻이 무엇입니까?』
  『 꿰맨 자국이 없는 이라야 비로소 아느니라. 』
  『 그 때 중이 「화상께서 이미 명백한 속에 있지 않다면 아낄 것이 무엇이겠습니 까?」 하니, 조주가 말하기를, 「나도 모르겠노라」 했는데, 그 중이 비록 그렇게 물을 줄은 알았으나, 마치 영리한 개가 흙덩이를 물어뜯는 격이겠습니다.』
  『 오늘 또 (흙덩이) 하나를 더 보태는구나. 』
  『 학인이 그때의 그 중이었다면 방석을 들어올리기만 하고 말하되, 「저는 평상시에 화상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았습니다」 했겠습니다.』
  『 그것도 역시 문 위에 문짝을 덧붙이는 짓이로다.』
  『 그 중이 「화상께서 모르신다면 어째서 명백한 속에 있지 않다고 하십니까?」 하니, 조주가 「문답은 되었으니 절이나 하고 물러가라」고 했는데, 조주는 못(釘) 부리에 무쇠 혀거늘, 어찌 어물쩍 하고 그만두었습니까?』
  『 나도 알 수 없도다. 』
  『 거기에 설명을 붙일 곳이 있습니까?』
  『 천동(天童)만 설명하지 못한다고 말하지 말라. 설사 조주(趙州)라도 역시 덜미 를 잡히리라.』
  『 "오랑캐의 수염이 붉다고 여겼더니, 수염이 붉은 오랑캐도 있구나" 하는 격이 겠습니다.』
  『 그 한 구절이 그나마 약간 나은 듯하구나.』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