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항상 ‘바른 생각'(正念)을 잃지 않아야 한다.
     
   

"항상 '바른 생각'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대개의 사람들은 언뜻 생각 하기를, '올바르지 않은 생각'을 배제한 '바른 생각', 즉 '올곧은 생각' '정직한 생각' '진실한 생각' 등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참으로 청정한 '본래 마음'을 깨치기를 기약한 사람이라면 「항상 '바른 생각'을 잃지 않아야 한다」 는 이 말의 중요성에 대해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바른 생각'을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청정한 '제 성품'을 깨치고 보임하는 요체이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마음'을 깨친 사람>이라면 '제 마음'이 본래 '신령한 앎'(靈知)이어서 '성품'이 항상 스스로 신령하게 아는 것이요, 결코 망령된 정식(妄識)이 '인연'을 좇고 대경(對境)에 기대면서 뜻(意)을 짓고 생각을 움직여서 아는 것과는 같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허공'처럼 그저 텅 비고 아주 없어서 전혀 '앎'이 없는 것과도 같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만약 마음을 내고 생각을 움직이면 곧 '법의 체성'(法體)에 어긋나고, 따라서 '바른 생각'을 잃게 된다. 공부하는 사람이 아직 '참 성품'을 깨치지 못해서, 보고 듣고 하는 가운데 무엇인가 나름대로 '알아들은 바'가 있으면 그 지견을 좇으면서 곧 생각을 움직이게 되는데, 생각을 내고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에 '바른 생각'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생각'이란 곧 <생각이 없이 아는 생각>임을 알 수 있다. 만약 아주 '앎'이 없다면 어떻게 '바른 생각'을 이룰 수 있겠는가. 따라서 학인이 공부하는 중에 혹시 지해(知解)가 생기더라도 결코 그에 집착해서는 아니 된다. 공부를 지어가는 과정에 어찌 노상 '깨달은 바'가 없을 수야 있겠는가. 그러나 만약 그 '지견'을 고수하면서 버리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바른 수행'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수행'은 '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지지만, 공부가 익어서 '참된 수행'이 이루어지려면 끝내 '지혜'는 끊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가령 「'참 앎'은 앎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참된 수행자라면 <앎이 있음>만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앎이 없음>까지도 보내야 비로소 '참된 수행'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에 이르러, 진정으로 '정도'(正道)에서 어긋나지 않기를 기하는 사람이라면, ― 이른바 '참된 발심'이니, '참된 믿음'이니, '참된 수행'이니 하는 등의 말이 뜻하는 바가, ― 뜻을 내고, 생각을 움직이면서 뜻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이 몸과 마음을 부지런히 갈고 닦아서, 그 연장선상에서 '구경의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왜 그렇겠는가? 만약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그 보람으로 '깨달음'을 얻었다면 즉, 그 전에는 미(迷)했다가 이제야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 '깨달음'은 <시작>이 있으므로 반드시 <끝>이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히 '참된 깨달음'이 아니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참된 깨달음'이란 모름지기 '참 성품'(眞性)을 깨쳐서 마치 '물'이 '물'에 합하듯, 잠잠히 자취 없이 '나'로서 '나'에 합하는 것뿐인데, 두말할 나위도 없이, '참 성품'은 본래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또한 본래도 깨끗했고 지금도 깨끗하기 때문에 이것을 '참 성품'이라고 하는 건데, 그렇다면 여기에 어찌 다시 이루고 이루지 못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정도'(正道)를 지향하는 사람이면 분명히 알아야 한다. 만약 '참 성품'을 깨달아서 몰록 '진리'에 계합하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지금 있는 이대로의 세간상(世間
相)>이 바로 '참 성품'의 응현(應現)일 뿐이어서, '참 성품'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을 일이다. ― 어찌 '물결'이 '물'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물결'이 아무리 사납게 출렁인다 하더라도 '물의 본질'이 전혀 변하고 옮기고 하는 일이 없음이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라면, 이것은 바로 '움직임'이 그대로 '고요함'이요, '고요함'이 그대로 '움직임'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때에도 흔히 방편으로 「인연 따라 물결이 인다」고 말은 하지만, 만법이 본래 '성품'이 없고 '작용'도 없는데, 그렇다면 인연이 화합할 때, 과연 무엇이 어울려서 인연화합을 이루겠는가? 다시 말해서, '바람'이 본래 일어난 일도 없는데 어떻게 '물'을 움직이게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알고 보면, 이 세상 모든 일이 매양 곡두처럼 났다가 곡두처럼 사라져서, 시종일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게 바로 제법실상(諸法實相)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의 과정이 반복되는 세간상도, ― 그것이 물리현상이건 심리현상이건 막론하고, ― 그 모두가 사람들의 허망한 분별심 때문에 마치 동·정(動靜)의 모양이 나누인 듯하지만, 진실은 전혀 본래 움직이는 일이 없는 '참 성품'을 벗어나는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눈밝은 사람이면 반드시 지금 현재 또렷또렷하게 아는 이 '마음'이 그대로 <몸과 입과 뜻>(身口意 三業)에 의탁하는 일이 없이 스스로 환히 아는 '신령한 앎'(靈知)이요, 이것이 바로 '작용 없는 근본지혜'(無作根本智)이며, 또한 이것이 바로 나의 '참 성품'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이 '마음'이 본래 나지도 않고, 지금에 사라지는 일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곧 '성품'을 보아서 단박 '성불'하는 도리이다.

아직 스스로 '성품'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다만 보통 일반적인 인정(認定)에 의해서 뜻(意)으로 이해한 바를 말로써 전한 것일 뿐인 <언교(言敎)의 자취>만을 좇으면서, 말 가운데 의 묘한 것을 취하여 헛되이 분별과 망상을 일삼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진실한 자리'에 있지도 못하면서, 나름대로 몇 마디 알아들은 바의 '망령된 지견' (妄見)을 마구 휘두르면서 온통 뒤바뀌게 마음을 쓰는 일이 요즘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하니, 참으로 어떻게도 손을 써 볼 도리가 없다.

'식'(識)은 분별이요, '분별'은 분명히 '참 앎'이 아니다. '참 앎'은 오직 생각이 없어야만 볼 뿐이다. 만약 '지혜'로 증득하여 얻은 바가 있다면 이것은 바로 '따져서 안 바(所詮)의 경계'이니, '참 앎'은 결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 결국 '마음'을 일으키지 않아야만 현묘(玄妙)함이 되는 것이니, 문득 일으켜서 마음을 비추는 것은 '참 앎'이 아니다. ― 모두어 일으키는 것을 '마음'이라 하고, 마음을 일으켜서 보면 '망상'이 되기 때문에 결코 '참 앎'이 아닌 것이다. '참 앎'은 반드시 '마음'을 비우고 '비춤'을 버리며, '생각'과 '말 길'이 끊어졌다. 그러므로 만약 볼 만한 것이 있고, 알 만한 것이 있으면 그것은 바로 '경계'일 뿐이다.

'참 마음'은 전혀 '자체의 앎'이라, '반연이 없는 마음'이요, 작의(作意)를 빌리지 않고 저절로 항상 환히 알며, 유·무의 포섭(包攝)이 아니고, 영원히 능·소를 초월했다. 그러므로 '참 앎'은 결코 증득하여 아는 것이 아니며, 본래 청정하기 때문에 장애를 끊어 없애기를 기다리지도 않는다. 고로 '참 앎'은 모든 중생에게 본래부터 온전히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겠으며, 다만 미혹에 가려서 스스로 알지 못할 뿐인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음'이 비록 '제 성품'이 본래 청정하다고 하더라도 마침내 깨치고 닦아야만 '마지막'을 얻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얼음'이 비록 '물'이기는 하지만, 이것을 '지혜'의 빛으로 녹이지 않는다면 어찌 관개(灌漑)의 공덕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늘 되풀이하는 말이지만, ― 중생이 미혹한 것은 본래 스스로 청정한 '제 성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참 성품'을 헷갈렸기 때문에 '본래의 마음'(本心)을 통달하지 못하고, 때문에 갖가지로 허망한 생각에 빠져들어서 늘 '바른 생각'을 잃게 되는 것 이다. '바른 생각'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때때로 혹은 미워하고 혹은 사랑하게 되며,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늘 '마음의 그릇'이 부서지면서 온갖 '번뇌'와 '생사' 를 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법요(法要)를 알기를 원한다면 본래 여여한 '제 마음을 지키는 것'(護心)이 첫째이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이 '참 마음'을 지키지 않고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짓겠다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모든 부처는 '일체법의 성품'이 비었다는 것을 깨쳤기 때문에 저절로 '마음의 근원'을 알아서 망상이 나지 않는 것이며, 때문에 '바른 생각'을 잃지 않고, 나아가 '나'와 '내 것'이라는 마음이 사라지기 때문에 '생사'를 받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끝내 항상 적멸하고, 적멸하기 때문에 온갖 즐거움이 저절로 돌아온다(寂滅爲樂).
 
만약 나의 '참 마음'(眞心)이 본래 스스로 여여해서 움직인 일이 없고, 밖으로 대경 을 반연하고 분별하면서 온갖 망상을 일으키는 '망령된 마음'(妄心)은 본래 나는 일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서, ― '참 마음'은 새삼 이루어지기를 기다릴 것이 없으며, '망령된 마음'은 새삼 없어지기를 기다릴 것이 없어서, ― 본래 스스로 온전히 갖추어져서, 조작할 것도 없고 대처할 것도 없는, 이 '한 마음'으로 단숨에 모든 법을 몽땅 거두어들인다면, 모든 '이름'과 '뜻'(義)이 나란히 끊어지고, '경계'에 대한 일체의 관(觀)도 몽땅 다 녹아서, '말'을 잊고 '뜻'(旨)에 계합하여 몰록 '구경'에 들게 될 것이다.
 
'참 비춤'은 '비춤'이 없고, '참 앎'은 '앎'이 없다.
만약 비춤이 있으면 상대할 곳이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비춤'을 따르면 '종'(宗)을 잃는다」 고 했으며, 만약 '앎'이 있으면 '앎의 장애'(所知障)를 받게 될 것이므로 따라서 이르기를, 「'법'은 '보고 듣고 깨닫고 앎'(見聞覺知)을 여의었다」 고 했다.

따라서 신심명(信心銘)에서는 다음과 같이 송했다.

가로 세로로 '비춤이 없음'이
가장 미묘함이 되며,
법을 알되 '앎'이 없나니
'앎이 없음'이 요문
(要門)을 아는 것이다.

만약 이 '요문'을 통달하면, 한 법도 <같을 만한 것이 없고>, 한 법도 <다를 만한 것도 없고>, 한 법도 <옳을 만한 것도 없고>, 한 법도 <그를 만한 것도 없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부질없이 밖에서 지해(知解)를 구하면서 헛되이 '바른 생각'(正念)을 어둡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