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의지함이 없고 머무름 없는 성품>(無依住性)을 허물지 않아야 한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어떤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의 사전적(辭典的)인 의미만을 피상적으로 파악하고는 마치 그 말의 뜻을 이해한 양 여기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일상의 대화 중에서도 이런 경우 종종 뜻하지 않은 오해를 낳는 수가 많은데, 만약 그것이 '존재의 본질'에 대한 탐구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 특히 어렵사리 회심 (廻心)해서, 관심문(觀心門)에 막 첫발을 들여놓은 사람이 <일체가 오직 '마음'뿐이요, '마음' 밖에는 진실로 한 물건도 없다>는 사실에 눈을 떠서, 경이롭고 환희에 찬 마음으로 미묘하기 그지없는 '마음 공부'를 시작한 사람이라면, 결코 과거처럼 '남의 말' ― 설사 그것이 성인의 말씀일지라도 ― 에 떨어져서, 말이나 문자의 뜻 풀이에만 골몰하는 일은 영영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인식작용은 인식의 주체인 '마음'으로 인식의 대상인 '경계'를 관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음 공부'는 그렇지가 않다. 인식의 '주체'도 '객체'도 다 오직 '마음'일 뿐이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결코 '마음'을 볼 수 없는 터이므로, 그렇다면 당연히 지금의
<이 '보고 들음'은 보고 들음인 채로 '보고 들음'이 아니라는 사실> 이 분명해진 것이다. 때문에 이 <'마음'을 깨치는 일>은 '보고 들음'으로는 미치지 못한다고 했던 게 아니겠는가.
 
결국 <생각하되 생각함이 없는 마음>으로 <청정하고 움직임 없는 '본래 마음'>을 돌아보는 것이므로, ― 그래서 <스스로 제 자리에 머무르는 삼마지>(自住自地三摩 地)라느니,
<스스로의 깨달음>(自覺)이라느니 하는 등의 말들이 있게 된 것이지만, ―물론 여기서 말하는 '자각'이 세간법에서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뜻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깨치는 일>은 분명히 지금까지의 인식작용과는 전혀 생소한 양상을 띠게 된다. ― 손가락으로는 손가락을 만질 수 없고, 칼로는 칼을 베일 수 없듯이, '마음'으로는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니 말이다. 이쯤에서부터 우리는 '마음 공부'라는 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어렴풋이나마 알아 차릴 수 있는 실마리를 잡은 셈이다. 「아! 그래서 '마음 공부'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것이구나」 하고 말하는 사람이 혹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마음'은 원래 알 수조차도 없는 것인데 어찌 '어렵다' '쉽다' 하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요컨대, '마음 공부'는 '아는 바'(所知)의 '경계'를 취할 게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알기는 분명히 아는데, 그 '아는 바'를 취하여 <나의 체험한 바>로 삼는 일이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분명히 통상적인 인식작용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깨치는 일>, 즉 <'성품'을 보아서 성불하는 일>(見性成佛)에는 어떤 지견 (知見)이나 이치(理致)도 끼여들 여지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물론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이 말도 역시 붙을 여지가 없는 것이다. 결국 '보고 듣고 깨닫고 알고'(見聞覺知) 하는 것으로는 미치지 못하며, 또한 이것을 여의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사람들이 <보고 듣고 깨닫고 알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그것은 '마음'이 아니고, 다만 '마음'에 비추어진 '상대경계'의 그림자가 아니겠는가. 이것은 '마음'이 '경계'를 대했을 때, 각기 저마다의 <길들여진 버릇> (業識)대로 빚어낸 알음알이가 엉기고(凝) 쌓이고(集) 하면서 생겨난 '의식'이었던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이 <업의 그림자>(業影)인 '의식'을 '제 마음'인 줄로 잘못 알고 지금껏 살아왔던 셈이다. 이 '의식'이 인연에 기대면서 알음알이를 일으키는 것을 오인하여 이것을 <능히 아는 힘>(能知力)이 있는 것으로 여겨서, 이것을 붙잡아서 '제 마음'으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의식'은 다만 인연을 따르면서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나는 것인데, 그림자나 메아리에 무슨 '생각'이 있고 '작용'이 있겠는가?
 
따라서 이 '의식'이 사물을 관찰하고 헤아리고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은 전혀 착각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고인은 말하기를, 「모든 인연은 다만 '성품의 비추어냄'(性照)일 뿐이요, 본래 '보는 자'도 '듣는 자'도 없느니라」고 했던 것이다. 결국 이 모두가 오직 '신령한 앎'(靈知)의 작용 없는 작용에 의해서 나타난 허망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음을 철저히 깨달을 일이다. 요약컨대, 이 '의식'으로 지어내는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모두 실체성(實體性)이 없는 것임을 분명히 깨닫는 일이야말로 바로 올바른 '마음 공부'의 첫걸음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금강경에 이르기를, 「마땅히 그 어디에도 머무름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하느니라」고 했던 것이다.
 
「'참 앎'(般若)은 앎이 없다」, 「'봄이 없음'(無觀)이 곧 '참된 봄'(眞觀)이다」, 「이 '보고 들음'이 보고 들음인 채로 '보고 들음'이 아니다」 하는 등의 말이 모두 그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대개의 사람들은 이와 같은 말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다만 그 말의 뜻풀이에만 골몰하기 때문에 헛된 지견만 쌓아갈 뿐, 도무지 '마음'을 돌이킬 생각을 하지 못하니 참 딱한 일이다. 이것은 남이 어떻게도 해 줄 수가 없는 일이며, 오직 자기 자신이 스스로 깨쳐야만 하는 것이다. 알아도 틀리고 알지 못해도 틀리고, 해도 틀리고 하지 않아도 틀리고, ― 그러므로 참된 '선지식'이라면 학인들에게 특별히 따로 일러줄 말이 있는 게 아니고, 다만 학인들로 하여금 이미 자기에게 구족하게 갖추어 있는 '신령한 깨달음의 성품'(靈覺性)을 등지지 않게 하는 것뿐이다. 때문에 스스로 환히 아는, 곧 어디까지나 '자체의 앎'인 이 '신령한 앎'(靈知)의 <의지함이 없고 머무름이 없는 성품>(無依住性)을 허물지 않게 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 일이야말로 선지식이 학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여러 방편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바로 <'붓다'의 비밀한 가르침>을 묵묵히 전하는 길인 것이다.

현사(玄沙)에게 경청(鏡淸)이 묻기를, ···
『 학인이 총림에 갓 들어왔으니, 스님께서 <들어갈 길>을 지시하여 주십시오.』 하니,
선사가 말하기를, ···
『 개울 물 소리를 들었는가?』
『 들었습니다.』
『 <그 속>으로 들어가라.』 하였더니, 경청이 이 말 끝에 <들어갈 곳>(入處)을 얻었다고 한다.

나중에 백운연(白雲演)은 이 화두를 들고 말하기를, ···
『 과연 들어갔다면 사방팔면으로 종횡(縱橫)하도록 맡겨 두라 마는, 만약 그렇지 못하거든 모름지기 <그 속>을 떠나지 말라.』고 하였고,

운문고는 말하기를, ···
『 만약 참으로 들어가려거든 곧장 <거기>를 떠나야 되리라.』 하였으며,

밀암걸(密庵傑)은 말하기를, ···
『 두 큰 노장이 모두 갈림길에서 만나서는 칠통(漆桶)으로 서로 문질러대니, 무슨 상쾌함이 있으리요? 나는 그러지 않으리니, ··· '들 입'(入)자 한 글자도 듣기를 즐겨 하지 않노라.』고 하였다고 한다.

불안원(佛眼遠)이 보설(普說)할 때, 이 이야기를 들고는 말하기를, ···
『 요즘 사람들이 분명히 알지 못하므로 「다만 '마음의 성품'(心性)이 두루하다」 고 말했을 뿐인데, 이 말을 듣고는, "그러면 듣는 것은 누구인가?" 하고 되물으니, 이와 같은 논의가 무슨 쓸모가 있으리요? 만약 '마음'을 알고 '성품'을 보면 '불법'은 매우 힘이 덜리는 것인데, 알기 쉬운 법문을 가지고 사람들 스스로가 고생하는구나. 후세 사람들이 옛사람의 뜻을 알지 못하고 <그 속>에서 눈을 반쯤 감고는, 몸과 마음을 억누르면서 우뚝우뚝 앉아서 깨달음을 얻기를 기다리니, 무척이나 어리석은 일이로다.』 하였다고 한다.

법운수(法雲秀)가 이 화두를 들고(拈) 다음과 같이 송(頌)했다.

    한 방울 개울물의 여울지는 소리를
    사해(四海)에서 듣는 이가 적도다.
    설사 곧장 현묘(玄妙)하게 안다 하여도
    이는 그저 정혼(精魂)을 희롱함일 뿐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