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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 현존하는 종교들 중에서 그 교리(敎理)나 교의(敎義) 가운데 <부정하는 말>(遮詮)이
가장 많이 나오기로는 아마도 '불법'이 단연 으뜸일 것이다. 그 까닭은, 여느 종교에서는 ― 무엇인가를 하라, 혹은
하지 말라 ― 하는 식으로 어떤 규범을 제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실천케 함으로써 그 공덕으로 금세(今世)에서의
'행복한 삶'이나, '신의 은총'을 바라게 하는 데 반하여, ― '불법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아서, ― 다만 공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본래 구족하게 갖추어져 있으면서도, 뿌리깊은 현세적 미망 때문에 오랫동안 드러나지 못하고
있었던 자기 자신의 청정한 '본래 성품'(本性)을 되찾아 가져서, 자재하게 쓸 수 있게 함으로써, 곧장 '진리'에
계합하여, 영원히 지선(至善) 지복(至福)한 '참된 삶'을 살게 하려는 데 그 '근본 뜻'(宗旨)이 있는 것이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초심자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나' 아닌 것을 '나'인 줄 알고, 이 '몸'과 '마음'이 몽땅 허망해서 실체가 없는 것임에도, 이에 집착하여 헛되이
생사(生死)를 받고, 또한 온갖 존재가 오직 '제 마음'의 무명으로 말미암아 헛되이 지어진 환(幻)과 같은 존재일
뿐, 진실로 '마음' 밖에는 한 물건도 없는 게 엄연한 진실인데도, ― 그런데도 늘 이 허망한 '경계'에 핍박을 받으면서
오랜 겁을 두고 줄곧 이렇게 뒤바뀐 채 살아온 범부의 처지로는, 도저히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 '무명의 굴레'를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때문에 사실은 모든 중생에게 본래 온전히 갖추어져 있는 '불성'(佛性)이므로, 새삼스럽게 보태고 덜고 할 것이 전혀
없는데도, 범부들의 무명의 뿌리가 워낙 깊어서, 그 완고한 아집(我執)을 도저히 예삿방법으로는 제거할 길이 없기 때문에,
예부터 많은 선지식들이 어쩔 수 없이 방편으로 '없다' '아니다' 등으로 결정해(決定解)를 지어서 중생들의 맺힌 업의
매듭을 풀어주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법'의 가르침에 '부정하는 말'(遮詮)이 많아지게 된 까닭이다. 그렇다면 여느 종교에서의 '없다'와
'불법'에서의 '없다'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여느 종교에서 말하는 '없다' 는 '있다'를 배제한 '없다'인데
비해서, '불법'에서의 '없다'는 '있다'만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없다'까지 함께 보내는 '없다'인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없음'의 뜻이니,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진정한 본분납자라면 필히 이 유·무 양변을
넘어섬으로써 '실상의 해탈'(實相解脫)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며, 생멸과 유무가 뒤섞여 있는 이 세간에
살면서도 항상 '평상한 마음'(平常心)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개의
학인들은 이 '차전'의 진정한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부정하고 끊는 말'만 중히 여기면서 매양 '공한 도리'에만
매달리니, '성품'을 밝히는 것은 차치하고, '중도(中道)의 뜻'인 들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이런 경향은 선종(禪宗)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 '선종'이 표방하는 대표적 언명 중 하나인 「말 길이 끊어졌고 문자도
세우지 않으며, 곧장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성품'을 보게 함으로써 성불하게 한다」(言語道斷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는 이 말은 간명하면서도 '성스러운 가르침'의 정곡을 찌른 훌륭한 말로 꼽힌다.
앞의 두 마디는 '차전'(遮詮)이고, 뒤의 두 마디는 '표전'(表詮)이다. 진여문(眞如門)에서 라면 '차전'도 '표전'도
다 붙을 여지가 없겠지만, 교화문(敎化門)에서 보면 어쨌거나 앞의 '차전'은 뒤의 '표전'을 위한 방편으로 설해진
것임이 분명한데,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지금 공부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온통 '차전'의 '끊는 말'에만 매달리면서
치우치게 마음을 쓸 뿐, 도무지 「본래 원만히 갖추어진 '청정자성불'(淸淨自性佛)을 몰록 드러내야
한다」 는 '표전'의 말씀에는 도시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으니 어느 세월에 깨달을 분수가 있겠는가?
사실 '말'이나 '문자'가 아니면, '말'이나 '문자'가 비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드러내 보일 것인가? ― 다만
스스로는 작용이 없는 '참 성품'(眞性)이 인연을 따르면서 <작용 없는 작용>(無作之作)을
짓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 있음>(有言)이 그대로 <말이 없음>(無言)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밝힌 것일 뿐인데, ― 온통 입을 쳐 닫음으로써
<말이 없음>을 삼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어쩌다 학인들이 '불법'의 깊은 뜻이라도 물을라치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던가, 소매를 훌훌 떨치고 자리를
뜨던가, 불쑥 불자(拂子)를 들어 보이던가 하면서, ― 모름지기 '불법'의 오묘한 뜻은 언설에 있지 않고, 오직 동용(動容)의
사이, 즉 움직이는 모양 가운데 있다 ― 고 말하니, ··· 물론 남의 '말'이나 좇으면서 지견놀이나 일삼는 무리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베푼 방편이라고는 하지만, 요컨대, 끝내 그들의 지혜가 열리지 않는 한, 남의 말만
좇던 버릇이 남의 몸짓인들 흉내 내지 않겠는가?
그래서 온통 할(喝)을 하고, 방(棒)을 치고 하면서 기행(奇行)을 일삼는 것이 마치 '불법'의 깊은 이치를 드러내는
유일한 표상(表象)이라도 되는 양 여기게끔 되어버렸으니, 오늘날 '선종'이 그 우수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거의 그
본연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게 된 데는 이와 같은 황당한 짓거리들이 큰 몫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다시 이와 같은 편향된 흐름을 바로잡기 위해서 「평상심이 '도'니라」고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말을
듣고도 문득 '무심정'(無心定)에 드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이 말을 깊이 수긍하면서 새로이 알아들은 바가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또 알아들은 바가 아주 없다면 이것을 무엇에 쓰겠는가?
결국 평생을 두고 분별만 일삼던 업식(業識)이 둘러빠지기 전에는 무슨 방편도 소용이 닿지 않는다. '마음'이 결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는데도, 여기서 다시 '평상심'(平常心)과 '비평상심'(非平常心)의 두 갈래를 지어놓고는,
'비평상심'을 배제한 '평상심'으로써 '도'를 삼는 것이 거의 대부분의 학인들이 가는 길이니, ··· 오대산(五臺山)
밑의 어느 노파의 말이 생각나지 않는가? "멀쩡한 스님네들이 또 저렇게 가는군!" ···
조주(趙州)가 사미(沙彌) 때에 은사와 함께 행각을 떠나서 남전(南泉)에게로 갔다. 때마침 남전은 누워 있었는데, 조주가 절을 하니, 남전이 묻기를,
「요즘 어디서 떠났는가?」
「서상원(瑞像院)에서 떠났습니다.」
「서상(瑞像 祥瑞로운 像)은 보았는가?」
「'서상'은 보지 못했습니다만 <누워 계신 부처님의 형상>(남전을 가리킴)은 보았습니다.」
하였다 한다. 이 말을 들은 남전이 벌떡 일어나서 다시 묻기를, ···
「 그대는 '주인'이 있는 '사미'인가?」
「'주인'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그대의 '주인'인가?」 했는데, ···요즘의 선객들 같으면,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손가락을 퉁겼거나, 동그라미를 그렸거나, 할(喝)을 한 번 했거나, 손뼉을 한 번 쳤거나, 소매를 흔들고 떠나버렸거나
하는 따위의 똥 방귀를 뀌었을 것이지만, 그러나 그대들 자세히 보라. ···조주는 천천히 앞으로 다가서서 말하기를,
···
「이른 봄 날씨가 아직 차가운데, 바라옵건대 화상께서는 법체(法體) 만강하옵소서」 하는 것이었다.
이에 남전은 유나(維那)를 불러서 이르기를, ···
「이 사미를 특별한 곳에 인도해 주어라」 하였다 한다.
이튿날, 조주가 다시 와서 묻기를, ···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하니, 남전은 방망이도 쓰지 않았고, 할(喝)도 하지 않았으며, 현묘한 진리를 이야기하지도 않았고, 경론(經論)을 인용하지도 않았으며, 고인(古人)들의 공안(公案)을 들추지도 않았고, '현실세계'나 '진리'를 말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진실 그대로를 그에게 말하기를, ···
「 '평상심'이 이 도(道)니라. 」 했으니, 조주가 이미
평상심을 깨달은 줄 안 까닭이 아니겠는가. 이에 조주가 다시 묻기를, ···
「그래도 닦아 나아가야 되겠습니까?」
「(意圖하는 바가 있어서) 향하여 나아가면 어긋나느니라.(擬向卽乖)」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도'인 줄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니, 남전이 말하기를, ···
「 '도'는 알고 모르는 데 속하지 않나니, 만약 안다면 허망한 깨달음이요, 모른다면
무기(無記)니라. 만약 <하려 함이 없는 도>(不擬之道)를 참되게 통달한다면, 마치
'허공'이 탁 트이고 휑하니 뚫린 것만 같으리니, 어찌 억지로 시비를 일으키겠는가? 이에 도달하려면 모름지기 <시방(十方)을
초월하는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 결코 남에게 이야기할 수도 없고, 남에게 전할 수도 없는 일이니라.」하기에
이르러서, 조주는 백을 알고, 천을 깨달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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