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행의 주체가 ‘나'인 동안은 천 리 밖이다.
     
   

보통 '자취'라고 말하면 종적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비공'(鼻孔), 즉 '콧구멍'을 '자취'라고 새겼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기를, 태생동물(胎生動物)은 모태 속에서 몸의 형상이 이루어질 때, '코'가 제일 먼저 생겨 난다는 설이 있어 왔다. 사물의 시조(始祖)를 비조(鼻祖)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 설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 설의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 앞뒤 문맥의 흐름으로 미루어 보건대, '콧구멍'을 '자취'라고 새긴 것은 바로 <'나'라는 생각>, 즉 그 완고하고 끈질긴 자아의식(自我意識)의 뿌리 없는 뿌리를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알면 될 것 같다.

그렇다면 모두(冒頭)의 「공부가 익었으면 나아가 그 '자취'(鼻孔)를 없애야 한다」 는 말은 다시 말해서
「 공부가 익어서 진여법성(眞如法性)에 계합하려면 첫째로 <'나'라는 생각>을 지워 없애야 한다 」는 뜻으로 새기면 되겠다. '나'가 없으면 곧 다생누겁(多生累劫)의 '무명'이 활짝 걷히면서 다시는 분별망상이 나지 않아서, 마치 거친 물결이 잠잠해진 뒤의 고요한 바다처럼 '만 가지 형상'(萬象)이 남김없이 동시에 환히 드러난다. 이것을 일러 해인삼매(海印三昧)라 하는데, 그러나 만약 학인이 이렇게 되기를 바란다면 영영 그런 일이 일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바람이 다시금 '마음의 물결'(識浪)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결국 중생에게 '해인삼매'가 분명히 나타나지 않는 까닭은 그 모두가 오직 무명에 갇힌 '나'가 망령된 분별과 간택을 일삼으면서 ···




이 세 가지의 '연집'(緣集 業緣이 쌓이고 맺힘)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태정명소(天台淨名疏)에서 이르기를, ···
『 중생의 기류(機類)는 한량이 없지만, 이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연집' 의 기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즉, ···

  첫째, 유위연집(有爲緣集)의 무리 이니, ― 지경 안의 <혹은 물들고 혹은 깨끗한(染淨) 국토>에서 모두 '진실'에 미혹하여 '존재'에 걸려서 결업(結業)을 일으키며 분단생사(分段生死)를 받으니, 이 모두가 <유위연집(有爲緣集)의 중생 무리>이다.
  둘째, 무위연집(無爲緣集)의 무리 이니, ― 지경 밖에 '다른 국토'와 '과보로 받는 국토'(果報土)와, 하급에서 중급까지의 '상적 광국토'(常寂光土)가 있는데, 이 세 가지 국토의 중생은 '중도의 불성'(中道佛性)을 미혹하여 진공무위(眞空無爲)에 걸려서 무위(無爲)를 반연하여 모든 결업(結業)을 일으키며 변역생사(變易生死)를 받으니, 이것이 바로 <무위연집(無爲緣集)의 무리>이다.
  셋째, 자체연집(自體緣集)의 무리 이니, ― 보살이 '자체'(自體)를 미혹하여 일으킨다. 마치 종문(宗門)에서 「'나'라는 소견을 잊지 못했다」 함과 같다.』고 했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철저히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 조금만 그럴싸한 경지를 얻었다 싶으면 ― 십중팔구는 길 한 가운데 집을 지어놓고 살 궁리를 차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약컨대, 지금 이 세상 사람들이 '실다운 존재'(實有)인 줄로 철석같이 믿고 있는 온갖 것들, 그것이 '존재'이건 '일어나는 일'이건, 또는 '나'이건 '나 없음'이건 간에 그 모두가 다 허망한 '업의 그림자'(業影)가 엉기고 쌓여서 나타난 허깨비와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철저히 밝히는 일이다.

'참 나'(眞我)로서의 '한 마음의 근원'에는 본래 '나'도 없고 '나 아님'도 없고, 물듦도 없고 깨끗함도 없고, '움직임'도 없고 '고요함'도 없고, '없는 것'조차도 없건만,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해서, 영겁토록 이 허깨비와 같은 존재에 시달리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던 끝에 어느 날 좋은 인연을 만나서 ― '나'까지를 포함한 이 세상의 일체 존재가 다만 무명에 가린 '제 마음'의 무지(無知) 때문에 본래 여여하고 청정한 '참 마음' 위에 허망하게 나타난 '업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 는 말을 듣게 되면, 놀라움과 함께 엄청난 분심(奮心)이 생기면서 옆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공(空) 무위(無爲)>에 떨어지고 마는 게 거의 대부분의 경우이다.

그러다가 '깨달아 살피는'(覺察) 지혜가 좀 익어서, ― '있고 없음'의 양변이 모두가 실답지 않다 ― 고 알아차리면, 이번에는 또 얼른 '중도'(中道)에 머물면서 이것을 마치 구경(究竟)이라도 되는 양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 그러는 가운데서도 참으로 울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는 기막힌 일은, 사람들의 이른바 '나 없는 경지'(無 我之境)를 성취하기 위한 뼈를 깎는 듯한 난행(難行)이다. 결국 그와 같은 노력이 계속되는 한, 그 노력의 주체인 '나'는 결코 없어지는 일이 없을 터인데도 말이다. 또 설사 '나 없는 경지'를 성취했다고 치자. 그러면 그 때, 그것을 얻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공부를 지어 가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어이없는 일들은 수없이 반복된다. 그만큼 우리의 삶이 역설(逆說)로 가득 차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화엄경에 보면, 『 일체법의 '한 모양'(一相)을 허물지 않는다. 』는 대목이 보인다. 이 말을 해석하기를, 「 '제일의제'(第一義諦)가 '무아'(無我)인 까닭에 '일상'(一相) 이라 」고 했으니, 따라서 여기서 "허물지 않는다"고 한 것은 바로 <'무아'를 허물지 않는다>는 것을 밝힌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무아'라고 한 것은 단순히 '자아'(自我)로서의 '나 없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 보다 넓은 의미에서, '온갖 존재'가 도무지 '이것'라고 가리킬 만한 실체가 없다는 뜻으로 쓰인 말임 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만약 「내가 '무아'를 알았다」고 하거나, 또는 「내가 '무아'를 증득했다」 고 한다면 이것은 곧 '무아'를 허무는 것이 되는 것이니, 왜냐하면 거기에 능·소 (能所)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요약해 말하면, <아(我)와 무아(無我)가 둘이 아닌 것이 곧 '무아'의 참뜻이니>, 이 '나 없는 법' 가운데 바로 '참 나'(眞我)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와 '무아'가 '둘이 아니라는 지해'(不二解)를 얻는 것>이 가장 뛰어난 자재(自在)이니, 모든 '자재' 중에서 으뜸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도 '성품의 여읨'(性離)을 보아서, '자재함'도 '자재하지 못함'도 다 놓고 그저 '성품에 맡김'(任性)만 하겠는가?

이것은 본래 '법성'(法性) 가운데는 '나 있음'과 '나 없음'이 둘이 아니요, '삼매'와 '번뇌'가 본래 평등한데, 보살이 이 '성품의 이치'(性理)를 깨치기 전에는 늘 '무아'에 집착하여, 밖으로 내달으면서 구하는 마음이 쉬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보살이 '성품'을 밝히게 되면, 비로소 지금까지의 권교(權敎)에서 벗어나서, 실교(實敎)에 나아가는 '참된 지혜'(實智)를 얻게 된다. 사람들은 이 말이 갖는 중요성에 대해 별로 깊은 인식이 없는 것 같다. 그것은 그들이 아직 '참된 지혜'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즉 아직도 그 오랜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말로는 '불법 공부'를 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과거처럼, 세간의 분별적인 차별상을 좇으면서 '생사의 바다'(生死海)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참 지혜'란 무엇인가? 이것은 바로 '신령한 앎'(靈知)을 말하며, 인연에 의지하는 일 없이 항상 스스로 환히 아는 '지혜의 광명'이다. 거기에는 자·타도 없고, 능·소도 없고, 간단(間斷)도 없어서, <오직 항상 환히 드러내기만 하는 하나의 '앎의 성품'일 뿐>인 것이다. 그것은 자아 중심적으로 맴도는 '의식'의 그것처럼, '알았다' '몰랐다',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는 일이라곤 도무지 없는, 그래서 언제나 <여여할 뿐인 지혜>(如如智)가 바로 '참된 지혜'인 것이다.

'나'가 없으니 '내 것'도 없다. 지금까지는 '나'가 곧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작용의 주체였다. 즉 '나'가 '나의 몸'과 '나의 입'과 '나의 마음'을 굴려가면서 모든 일을 지어나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 이 <몸과 입과 뜻>(身口意 三業)이 '자체의 성품'이 없는, 마치 허깨비 같은 존재여서 '업의 성품'(業性)이 비었음이 밝혀졌고, 따라서 <몸과 입과 뜻>을 굴려가면서 시간과 공력(功力)을 들여서 무엇인가를 이루고 허물고 한다는 것이 전혀 환상이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로 지금처럼 이렇게 몸과 입과 뜻을 굴려가면서 매일같이 땀을 흘리며 열심히 노력하는 현장에 '작용의 주체'가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왜곡되고 혼탁한 '의식의 바다'에서 '인과법'에 갇힌 채 살아가는 범부들에게 있어서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진실이다.

결국 모든 법이 생멸하는 것은 전혀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이요, 본래 거기에는 '짓는 자'도 '받는 자'도 없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며, 이것이 곧 '무생법인'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드러나게 된 이른바 <공용 없는 지혜>(無功用智)인 것이다. 이에 이르러 <몸과 입과 뜻>에 의탁하지 않고 항상 스스로 일어나는 '작용 없는 지혜'(無作智)가 다만 인연을 따르면서 <머무름 없는 인연>(無住因緣)을 짓는 행이 바로 <공용 없는 행>(無功用行)이며,
이것이 바로 '여래의 행리'(如來行)인 것이다. ― 무공용(無功用)이므로 '고요함'(寂)이요, 행(行)이므로 '작용이 있음'(用)이어서, ― 이에 이르러 비로소 <고요함과 작용이 걸림이 없음>(寂用無碍)을 얻게 됨으로써 여여한 '부처 지혜'가 처음 드러나는 첫머리이기 때문에 이를 일러 동진지(童眞智)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움직이는 몸'과 '움직이는 마음'을 붙잡아서 '나'로 삼고는, 이 '몸'과 '마음'을 부지런히 갈고 닦아서 그 보람으로 먼 훗날 노력에 상응하는 '불과'(佛果) 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여기는 것은, 전혀 이것은 세간의 허망한 유위법일 뿐이며, 인(因)도 과(果)도 다 비어서, 끝내는 아무 성취도 없는 허망으로 돌아가고 만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아직도 대부분의 학인들이 여전히 과거처럼 허망한 유위행에만 의존하면서 애써 '깨달음'을 얻기를 갈망하고 있으니, 그래 가지고서야 어찌 정각(正覺)을 이룰 수 있겠는가? 그들에겐 '올바른 믿음'도 없고, '올바른 발심'도 없으니, 그야말로 당나귀 해가 되어도 깨달을 분수가 없다는 말이 적격일 것 같다.

그러나 일승보살(一乘菩薩)이라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그들은 초발심에 문득 모든 법의 '성품 없음'(無性)을 보아서, 만법이 오직 '한 마음'에 의지하여 자취 없이 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친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마음'이 그대로 '부처'>라는 사실을 깨달은 터이므로, 처음 발심했을 때 바로 불과(佛果)를 얻고, 다시는 '구경의 깨달음'(究竟覺)을 증득하는 일은 없다. 이 길만이 유일한 길이며, 모든 여래도 오직 이 길을 따라 성불했음을 알아야 할 일이다.

소수선사(紹修, 修山主)가 다음과 같이 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