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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하지도 않고 아주 없지도 않고(不常不斷),
'공'도 아니고 '존재'도 아닌 것, 이야말로 '열반'의 지극한 도리이며, 바로 이것이 여래의 일대교화(一代敎化)의
참 뜻이요, 다같이 두루하고 원만하여 '불법'의 깊은 바다를 다하였다.
― 만약 진실로 그렇다면 그와 같은 사실을 누가 어떻게 알까? ― 그러므로 이 '진공'(眞空) 은 이해하기 어려워서 실로 미묘하게 그 뜻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공'이니, '존재'니 하는 따위의 말이나 글만을 따른다면 이 모두가 '진실'을 등지고 삿된 소견에 떨어진다는 것을 명심할 일이다.
그러므로 민절무기관(泯絶無寄觀)에 이르기를,···
『 이 '관할 바'(所觀) '진공'은 '물질'(色)에
즉한다거나 즉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고, 또한 '공'(空) 에 즉한다거나 즉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다. 온갖 것 모두가 옳지 않고, 옳지 않다는 것도 또한 옳지 않으며, 이와 같은 말조차 붙지 않아서,
멀리 끊어져 도무지 붙는 데가 없다. '말'로써 미칠 바가 아니요, '이해'(理解)로써 이를 바도
아니다. 』라고 한 것이다.
이미 누차 언급했듯이, 「'마음'에 능·소(能所)가 없어야 정각(正覺)을 이룬다」고 했다. 따라서 만약 '관하는
바'(所觀)가 있으면 곧 '능히 관하는 마음'(能觀)이 있게 되어서 '바른 깨달음'을 등지게 되며, 따라서
<부처 집안의 참 자식>으로 태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부처
집안의 참 자식>으로 태어나는 것일까? ― 가령「'티끌 경계'는
남이 없고(無生)
성품도 없다(無性)」고
보는 때에, 바로 이와 같이 보는 '지혜'도 또한 '남이 없는 법'(無生法)으로부터
나는 것임을 분명히 알면, 이것이 '부처 집안'에 태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표제의 「관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는 말도 잘 새겨들어야 한다. 그러기에 예부터 참으로 매끄럽고도 험한 길이라고 했던 게 아니겠는가?
무릇 '문자'나 '언어'에 비친 것이면 이 모두가 '마음의 자취'이며,
내지 이것을 '진여'(眞如)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만약 활연(豁然)히 '자취'를 알아서,
<만법이 오직 '마음'의 '제 성품'일 뿐임을 보게 되면> '근본'은 스스로 환히 드러나면서 '자취'에
대한 집착은 저절로 끊어지고 종(宗)으로 돌아가겠지만, 만약 '자취'에 미혹하여 대경(對境)을
좇는다면 곧 '근본'을 잃게 된다. 따라서 이 사실을 분명히 알면, '근본'과 '자취'는
비록 서로 다르더라도 <'근본'의 부사의(不思議)함>, 곧 사량 분별로 미치지 못하는 자리에서는
동일한 것이며, 만약 이 이치에 어두우면 '근본'과 '자취'를 모두 미혹하여, 여전히 망령된 정식(妄情)을
따르면서 스스로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진여'(眞如)와 '법성'(法性)은 이
모두를 '자취'라 하며, 모든 법의 '실제'(實際)도 또한 '자취'라 한다. 그러므로 <남이
없고 멸함도 없는 도리>(不生不滅)도 역시 '자취'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 문자 그대로 「마땅히 그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고 머무르는 바 없는 '성품'」임을 알 수 있으며, 끝내 이런
말도 붙지 않는 다. 그런데 지금의 대개의 사람들은 다 이 '방편'과 '언교'(言敎)의 자취에만 집착하면서
'한 마음'의 '올바른 뜻'(正義)의 '근본'을 잃어버렸으며, 그러면서도 그와 같은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관하되 관함이 없는, 이른바 <'참된 관'(眞觀)에
든 이>가 미묘하게 '진실'을 얻어서, 모름지기 생각없는 '무심한 정'(無心定)에 들어서
'법신의 이체(理體)'를 얻고, '허공성'에 칭합해야 비로소 '작용 없는 근본지'(無作根本智)에
의지하면서 '방편'으로 (작용 없는) '지혜'를 마음대로 굴리고, (일으킴 없는)
공양심을 일으켜서 작용의 자재함을 얻게 되고, '이지'(理智)에 가지런히 합하게 될 것이다.
만약 오로지 <공하고 모습 없는 법신>만 닦는다면 그 '지혜'는 능히 '큰 작용'(大用)을 일으킬
수 없으며, 또한 만약 한결같이 생각을 일으킴으로써 <모습 없는 법신>을 보지 못한다면 이것은 순전히
'유위'일 뿐이다.
강학(講學)하는 사람이나 참선(參禪)하는 이들이 모두 헷갈려서, <'마음'을 깨쳐서 '성불'하는
일>을 마치 하나의 '종'(宗)이나 하나의 '가르침'(敎)으로 여기는 것 같다. '마음'은 사람마다
본래 온전히 갖추어져 있는 것이고, 또 본래부터 청정무구하여 생멸하거나 왕래하는 일도 없어서, 전혀 조작하거나
대처할 일이 없는데도 말이다. 때문에 '마음'을 알고 '성품'을 보고 나면, '불법 공부'란 참으로 힘이
덜리는 것인데 사람들이 알지 못해서 공연히 유위의 공덕만을 추구하면서 도무지 수혹(修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모두가 '공한 도리'만을 내세우면서 <오직 모양(相)을
부수는 것>으로써 '참 성품'을 드러내는 유일한 길인 양 알고 있는 게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병통이니, 참 어쩔 수가 없다.
'성스러운 뜻'(聖旨)은 반드시 <지금 현재 뚜렷이 아는 이 '신령한 앎'(靈知)이
곧 '나의 성품'임을 분명히 알아야> 비로소 이 '앎'이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면서 항상 스스로
환히 밝음을 보게 된다. 진실로 '나의 마음'이 '허공'과는 같지 않아서, <'성품' 스스로가 신령하게
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는다면, 결코 타(他)에 의지해서 깨치는 것이 아니거늘, 어찌
'인연'을 빌리면서 헛되이 밖에서 '지혜'를 구하겠는가.
지장(地藏)이 어느 날 보복(保福)에게서 온 중에게 묻기를, ···
『 그 쪽에선 불법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보이는가?』 하니, 중이 대답하기를,
『 보복 화상이 때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눈을 막아서 그대로 하여금 보되 보지 못하게 하고,
그대의 귀를 막아서 그대로 하여금 들어도 듣지 못하게 하고, 그대의 뜻을 좌정시켜서 그대로 하여금 분별하지
못하게 하노라」 라고 합니다.』 하였다. 이에 선사가 말하기를, ···
『 내가 이제 그대에게 묻노니, 내가 그대의 눈을 막지 않으면 그대는 무엇을 보며, 그대의 귀를 막지
않으면 그대는 무엇을 들으며, 그대의 뜻을 좌정시키지 않으면 그대는 어떻게 분별하는가? 』 하니,
그 중이 이 말끝에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공부하는 사람이 만약 허망한 분별 망상의 소산인 '세간의 말'을 좇지만 않는다면 '자기의 성품' 위에서는
참으로 드러내 보일 만한 단 한마디의 '진실한 말'도 있을 수 없을 텐데, 어찌 '차전'으로 "아니라"고
하는 '방편의 설명'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직 스스로 '성품'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다만 보통 일반적인
인정(認定)에 의해서 <뜻(意)으로 이해한 것을 전한 말>만을 좇으면서,
언어 중의 묘한 것을 취하여 <'차전'으로 부인하는 말이나, '끊는 글'>로써 극칙(極則)을
삼는 것은 아직 그들이 '진리'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 그들은 아직 '진리'에 계합하지 못했으므로
한결같이 '공한 도리'나 그밖에 단편적으로 얻어들은 말에만 매달리면서 늘 뒤바뀌게 마음을 쓰니, 참으로
그 '마음'을 돌이키기가 어렵다.
화엄경에 보면, <공(空)과 무아관(無我觀)을 타파하고 승(乘)하는
바 문>이라는 말이 보인다. 이 말의 뜻을 살펴보면, ― 우선 처음에 '반야'(般若)를 설해줌으로써
범부들이 한결같이 온갖 법을 실다운 존재로 오인하여 집착하는 것을 막고, 이어서 '이승'들의 '생공아집'(生空我執)을
타파한다는 것이다. ― 여기서 '생공의 아집'이란, 곧 생공(生空)은 아공(我空) 인공(人空) 즉, 중생이
'오온'의 '거짓 화합'(假和合)이기 때문에 '실체의 중생'이 없다는 뜻이며, 아집(我執)은 이 '생공'을
잊지 못하는 아집을 말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물·심(物心) 양면의 일체법이 모두 공했다는
사실, 즉 '법공'(法空)을 사무치지 못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아공'(我空)의
아집>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법화경(法華經)에 이르기를, ···
『 가사 어떤 사람이 팔만사천 법문을 독송하여 타인을 위하여 해설을 하며, 또한 '육바라밀'을 행하고 '육신통'(六神通)을 얻는다 하더라도 이것은 차라리 어려움이 되지 않으나, 잠시 동안 이 경전을 읽는 것이 더욱 어려움이 되느니라.』고 했다. 왜냐하면 이 법화경은 '불승'(佛乘)을 성취했기 때문이요, '보살승'(菩薩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반경(涅槃經)에 이르기를, ···
『 모든 중생이 다 불성(佛性)의 상·락·아·정(常樂我淨)이 있다.
』고 했으니, 이에 이르러 모든 보살이 스스로의 허물을 뉘우치면서 말하기를, 『 우리들이 한량 없는 겁
동안 '생사'에 헤매었던 것은 다만 '무아'(無我)에 혹란(惑亂)한 바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탄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허물이 있으므로, 만약 참된 학인이라면 모름지기 그 <'마음'을 돌이킬 줄을
알아야>(廻心) 비로소 가히 '성품'을 보아서 <지금의 이 '나'가 그대로 '지혜'임>을
체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들이 「과거 무량한 겁에 '무아'(無我)의 혹란을 입었다」고 한 것은 곧, 회심(廻心)하기 전의 이승(二乘)의 경지를 후회한 것이다. ― 무시 이래로 좇아 오면서 다만 오직 망령된 헤아림을 따를 뿐이었으므로, 따라서 능히 '불법'에 믿음을 내더라도 다만 정식(情識)을 따라서 믿음을 내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자기의 '지혜경계'를 미혹했던 것이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참된 지혜'(實智)에 계합하여 '참된 믿음'을 일으켜서 닦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이 만약 '회심'하지 않는다면 필경 성불하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은 설사 중생을 교화하더라도 겨우 삼승(三乘)이나, 인간 세계, 하늘 세계의 부류를 이루는 것이 고작이며, 다만 분별과 조작으로 어쩌다 '깨끗한 자리'(淨刹)를 얻게 되면 거기 머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광대한 법계의 허공 같이 '가 없는 지혜'(無邊智)의 큰 안목>을 갖출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여래의 교화가 항상 다함 없는 불국토의 티끌에까지 충만하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결국 이들 '삼승'의 부류들은 그 짓는 바가 모두 '가와 한량'(邊量)이
있으므로 <'법계'의 하나하나의 티끌 가운데 '가'도 '한량'도 없는 법>과, <'보현의
행법'(普賢行法)이 서로서로 다함 없이 갈마들면서(互參) 걸림 없이 굴리는 '무한한
큰 작용'(無限大用)>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크게 발심한 대장부가 허망한
관(觀)에 머물면서 자신의 '신령한 앎'(靈知)을 어둡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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